솔직히 고백하자면 풋풋하던 이십 대 초반시절, 대학에서 처음 만난 친구들 가운데 지금도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이슈들에 대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대화할 수 있는 친구는 이제 몇 남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현실정치와 같은 극도의 예민한 주제들은 웬만하면 입에 올리지 않는 금기어가 되어 버렸으니 주제를 가리지 않고 맘껏 떠들 수 있는 친구는 아무도 없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주제에 대하여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던 그 많은 친구들이 언제부턴가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요사이는 눈을 씻고 둘러봐도 주변에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슬프게만 다가온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삼십 대와 사십 대 오십 대 육십 대를 입문하면서 점점 더 그 고약한 증상이 심해지기 전에는 분명 그러지 않았다.
풋풋한 청년시절, 가슴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세상의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공감할 수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들의 공감능력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떠들듯이 자신의 주장을 말하지만 좀체 다른 의견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는 고집불통의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해를 더할수록 머릿속에 빈 여백이 없을 정도로 자신의 주관으로 꽉 채워지고 있어 좀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일 공간이 부족하여 발생한 일이다.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마음의 여유가 사라진 그 자리에 아집이라는 편견이 자리를 넓혀가고 있다는 의미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마음의 빈 여백이 늘어날 것 같지만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의 현상으로 나타나니 당혹스럽기가 그지없다.
나의 생각, 우리 진영의 주장이 옳다고 여기는 마음이 너무나도 강력하게 작동하여 마치 머릿속에 늙은 구렁이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앉아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대학생 때 처음 만나 만만찮은 사십 년의 세월을 함께 헤쳐 나왔건만 어찌 된 영문인지 요사이는 만났다 하면 티격태격 도무지 원만한 대화가 불가능한 실정이다.
돌이켜서 생각해 보면 거의 무한대의 가능성을 품었던 청년시절의 이상과 만만치 않은 현실생활의 혹독했던 삶이 마음의 빈 여백을 지워버렸다는 생각이다.
풋풋하던 대학생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지금의 우리 모습은 삶에 찌들어서 비과학적인 인생을 살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듯하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부릅뜨고 오직 사회과학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당시로 되돌아가보자.
계몽룡이며, 99명 중국간첩설을 어떻게 비판 없이 태연히 말할 수 있으리라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어디 그뿐이던가! 체포될 수 있으니 최 대행 몸조심하라는 막말이며, 대행에 대행을 탄핵하여 대행에 대행에 대행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은 또 어떤가!
평상심을 유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는 이런 낯부끄러움을 사십 년 전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직 자신이 보고 싶은 것,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하는 확정편향에 빠진 비과학적인 삶의 전형이라 할만하다.
이런 모습들이 특정의 유별난 사람들이 아닌 지금 우리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니 수상한 시국 탓만 하기에는 뭔가 낯간지러운 느낌마저 든다.
언젠가 술에서 깨어나 평상심을 회복한다면 얼굴 들고 다니기에도 민망함이 몰려오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독립투사라도 되는냥 여기저기서 당당하게 외치는 세상이다.
이런 식의 단편적이고 획일적인 마음으로는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리는 정상적인 사회의 조합이 어려워 보이지만 그럭저럭 굴러가는 세상이 신기할 따름이다.
대학시절 철학동아리를 함께 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문화 역사 철학 종교 등 세상의 모든 주제에 대하여 밤새 토론하던 시절 우린 모두 물리주의자를 자처했다.
낡은 생각과 비과학적인 사회문화를 싫어하고 언제나 과학적인 삶을 추구했다.
그런데 그놈의 팍팍한 세상살이가 당시의 멀쩡한 청년을 이토록 병들게 만들고 말았다.
그래프를 그려보자면 시간이 지날수록 거진 45도 각도로 가파르게 마음의 빈 여백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걸릴 것 하나 없이 무한대의 가능성을 꿈꾸던 풋풋한 청년이 팍팍한 세상살이의 파고에 찌들다 보니 자신들이 쌓아 올린 아집의 성에 갇혀서 귀중한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형국이다.
해를 더할수록 점점 더 공감대가 모아지지 않으니 의도적으로 말수를 줄이게 되고 심지어는 매주 다니던 산행도 불편해졌다.
요사이는 경조사 때나 의례적인 만남이 있을 뿐 오랫동안 유지돼 오던 단체 카톡방마저도 사라지고 가끔씩 개별 카톡을 하면서 안부를 묻곤 한다.
자신의 보금자리라도 되는냥 머릿속에 늙은 구렁이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앉아 주변을 위협하면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는 꼴이라고나 할까?
아집! 아무런 과학적인 근거도 없이 단지 그 자신의 경험과 판단만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오직 그 자신만의 편협한 성이다.
이 편협한 성은 저 홀로 고립되었다는 사실조차도 모른 채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더욱 높고 견고하게 축성될 것이다.
이 외톨이 성에 갇힌다면 그 결과는 굳이 보지 않더라도 불을 보듯 명약관화하다.
한 명 한 명 서로의 연결고리에서 떨어져 나와 각자 쓸쓸히 사라질 운명이라면 이제 정답은 정해졌다.
그 답답한 굴레를 박차고 나와 쾌쾌 묵은 생각의 저장강박증에서 탈출해야 한다.
더 늙고 병들기 전에 고집불통의 머릿속을 비워서 타인의 생각이 들어올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가까이 다가오기가 불편했던 오랜 친구들이 예전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찾아올 수 있도록 텅텅 비워내야 한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회복하자면 문제의 근원을 찾아서 잘못된 부분을 과감하게 도려내고 바로 잡아야 한다.
그러자면 떠나야 한다.
뒤죽박죽 엉클어진 머릿속을 비우러 속히 떠나야 한다!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앉은 퇴보의 진영에서 벗어나 하루속히 히말라야로 여행을 떠나야 한다.
여행을 다녀온 후에는 또다시 아집과 편견의 구렁이가 똬리를 틀지 못하도록 이번참에 마구잡이로 지어진 관념의 집을 무너뜨리고 과학적인 구조로 새로운 집을 지어야 한다.
세계적인 석학들이 펴낸 신간을 읽으면서 그들의 생각을 공유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유튜브에서 퍼뜨리는 허접한 정보가 아니라 진보와 보수를 망라한 5대 일간지의 사설을 매일매일 꼼꼼하게 정독하면서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접하는 것이 과학적인 방법이다.
답답한 숲 속을 벗어나 탁 트인 허허벌판에서 숲을 바라보면 코끼리의 단면이 아닌 온전한 실체를 바라볼 수 있는 법,
생각해 보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상대의 의견을 쏙쏙 흡입하던 이십 대의 청년시절이 무척이나 사랑스럽고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