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선언 2
대통령 일행이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공식 영빈관인 조어대에서 여장을 풀었다.
이제 막 여장을 푼 대통령 일행에게 여독을 풀 잠깐의 휴식조차 생략하는 홀대의전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었다.
시 주석의 일정표에 맞추어야 한다는 부장조리의 닦달에 예정보다도 한 시간이나 일찍 조어대를 나서 곧장 인민대회당으로 이동하는 수모는 시작에 불과했다.
다분히 형식적인 환영식과 만찬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시 주석은 대통령에게 애써 눈길을 외면하는 무례로 일관했다.
초장부터 기선을 제압하려는 듯 시종일관 잔뜩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오늘의 회담이 만만치 않음을 알리는 한 편의 예고편과 같았다.
불편하고 따분하게만 진행되던 만찬이 끝나자 곧바로 시 주석과의 단독정상회담에 들어갔다.
“최근 남북한은 통일헌법의 제정 논의에 착수했습니다,
평화통일의 대장정을 시작하는 역사적인 시점에서 귀 국의 적극적인 지지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회담은 시 주석 특유의 여유 넘치는 미소와 부드러운 화법으로 느긋하게 시작되었다.
“남북한의 평화 통일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습니다, 대찬성입니다!
단 한국주도로 통일이 이루어질 경우 중국의 국가이익이 침해받는 영역이 있어 그것을 우려하고 있을 뿐입니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주한미군과 직접적으로 대치하는 상황은 어떤 경우에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통일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주한미군의 철수부터 선행돼야 합니다!”
시 주석의 표정과 목소리가 비우호적인 어감으로 바뀌기 시작하자 대통령도 어느새 경직되기 시작했다.
양국의 지도자는 마치 서로 상대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 처음부터 작정하고 강공으로 주고받았다.
이때 윤 비서관이 대통령에게 눈빛 신호를 보냈다.
시 주석이 주도하는 빠른 템포에서 이탈하여 대화의 속도를 한 발작 늦추자는 싸인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을 태세로 임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조금의 빈틈이라도 허용할 경우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은 확실하게 마무리 짓고 싶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들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하고 번영하기 위해서는 주변세력 간의 균형을 잘 유지하고 조정하는 것은 주권국가로서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통일 이후에도 미군이 주둔함으로써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에 도움이 된다면 주변지역의 안정에도 기여하리라 생각합니다!”
이 말을 들은 시 주석이 뜨끔했다.
자신들의 의도를 들킨 사람처럼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상국의 황제가 약소국의 일개 왕을 다그치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한반도의 통일 이후에도 미군의 주둔이 필요할 만큼 우리 중국을 경계하고 있다는 말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시 주석이 호통 치듯 말하고 있었지만 대통령은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한 치도 밀리지 않겠다는 기세로 대응했다.
“통일한반도는 안보든 경제든 외교든 중국의 제반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선린우호의 정책을 지향할 것입니다,
80년간 지속된 한미 군사동맹도 통일을 준비하는 한반도의 변화된 환경에 발맞추어서 점진적으로 조정될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의 깊은 우려를 감안하여 주한미군은 현 위치에서 더 이상 북상할 수 없도록 조치하겠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미래의 통일정부가 지향하게 될 외교정책은 미중사이의 철저한 균형자 외교로서 엄정중립을 견지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말하는 동안 정상회담에 임하는 시 주석의 무례한 태도가 도를 넘고 있었다.
양손을 깍지 낀 채 턱을 받치는가 싶더니 대통령과는 아예 시선을 회피했다.
주변국의 왕이 직접 알현하여 대국의 우려를 풀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지만 마음속 깊이 동북공정을 품고 있던 시 주석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시 주석 아니 시 황제의 삐딱한 자세와 화난 얼굴표정에서 그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렵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괜스레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국익에 반하는 결과를 자초하지 않겠다는 말씀인 것 같은데 지난 반만년동안 우리 중국과 한반도는 형제관계를 유지하면서 잘 지내왔어요,
한반도는 앞으로도 우리와의 관계를 최우선 순위로 고려하지 않는다면 여러 가지의 고통이 동반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북 간에 통일을 추진한다고 하니 물어보는 말 입니다만 통일이 된다면 북한의 핵과 미사일 전력은 어떻게 조치할 계획입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사실 이 질문은 회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질문이었지만 영악한 시 주석이 빈틈을 주지 않고 돌직구를 날렸다.
어쩌면 중국보다는 미국이 더 궁금해할 답변이기도 했다.
또다시 윤 비서관과 눈빛을 교감한 대통령이 삼일특공대의 제안대로 거침없이 발언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회피할 수 없는 답변이라면 이번 기회에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주석님! ICBM급의 장거리탄도미사일은 미국의 절대적인 우려도 있고 해서 향후 미국과 좀 더 논의를 해볼 사안입니다.
하지만 최근 일본의 독도침략에서 보았듯이 일본의 도발을 억제하는 차원에서도 그 외의 무력자산은 안전하게 운용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대통령의 발언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 주석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탁자 유리판에 찻잔 부딪치는 소리가 둔탁하게 났을 정도였다.
“통일 이후에도 핵자산을 보유하겠다는 것은 주변국의 깊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핵보유국이 되겠다는 것인데 이 의제는 간단히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세계가 한 목소리로 주문하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조치를 통일 한반도 정부는 지킬 의사가 없다는 말로 들립니다만!”
통일한반도의 핵보유국 지위문제는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을 초반부터 강경하게 견지하자는 것이 삼일특공대의 주문이었다.
지금 시 주석은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지만 대통령으로서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최근에 우리나라는 북한의 핵무력이 없었다면 일본으로부터 우리 땅 독도를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통일한반도가 주변국의 침입으로부터 영토를 보전하기 위한 자위적인 수단으로써 핵무력을 유지하겠다는 것은 주권국가로서의 당연한 권리에 해당합니다,
없던 핵을 새롭게 개발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기존의 핵자산을 안전하게 보유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주석께서도 통 크게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시 주석의 속셈을 훤히 꿰뚫고 있던 대통령이었다.
중국의 압박에 단 한치도 밀리지 않겠다는 결기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