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폭죽놀이 2
계엄령이 선포된 연변조선족 자치주는 대로변을 점령한 수십 대의 탱크들로 살벌한 풍경을 자아냈다.
밤 열 시 이후의 야간통행금지조치로 생기를 잃어버린 도시는 오직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숨바꼭질만 있을 뿐 그 어디에서도 사람이 살아가는 도시로서의 훈기를 찾을 수 없었다.
세계인들을 감동시킨 십만 인파의 재중동포 만세사건이 끝나자마자 공안은 즉각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만세사건을 주도한 연변조선인향토연구소를 불온단체로 지목하여 폐쇄조치하고 성주를 비롯한 오십여 명의 청년단원을 체포하기 위해서 자치주전역을 들쑤시고 다녔다.
미리부터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한 성주일행은 대통령의 의전차량이 연길공항으로 들어가는 것을 신호로 제각기 흩어져서 꼭꼭 숨어들었다.
십만 이상의 소수민족이 참여한 역대 급의 만세운동이 미칠 파장을 티베트나 위구르의 탄압을 통해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포분위기 속에서 조선족에 대한 당국의 사상교육은 거의 매일 실시되었다.
조선족들에 대한 3관 교육이라 하여 역사관 민족관 조국관을 새롭게 심어주는 교육이었다.
조선족의 역사는 중국에 살고 있는 소수 민족의 역사이고,
조선족은 중국에 살고 있는 55개의 다양한 민족가운데 하나의 민족이며,
조선족의 조국은 중국이다는 사상교육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반복적으로 실시했다.
이번사태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던 길림성의 공안청장은 장춘으로 돌아와서도 안절부절못하지 못했다.
아직 왕 회장으로부터 단 한 통의 전화도 없다는 사실은 공안의 대응에 불만이 커다는 증표다.
이때 밖에서 작은 소란이 이는가 싶더니 내심 애타게 기다리던 왕 회장이 훠치산을 대동하고 불쑥 나타났다.
뒤따라서 비서실 소속의 공안이 황급히 들어왔지만 청장이 괜찮다며 오히려 차 대접할 것을 지시하자 왕 회장이 그 큰 엉덩이를 소파에 내려놓으며 투덜댔다.
“저 예쁜 아가씨는 말이야,
내가 올 때마다 기다리라고만 하니 어디 성질 급한 사람은 화닥질이 나서 살겠는가 말이야,
사람을 봐가면서 기다리라고 해야지 젠장!”
잔뜩 짜증을 부리며 투덜대는 왕 회장에게 몰래 숨겨둔 재떨이까지 꺼내오던 공안청장이 너스레를 떨 듯이 말했다.
“시거나 한 대 피우면서 그만 화 푸시오 왕 회장!
이번에 천지회에서 고생이 참 많았는데 중간에 일이 꼬여버려서 우리 입장에서도 왕 회장 보기가 민망하게 되었소,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할 만큼 한 것이니 너무 섭섭하게는 생각하지 마시오!”
훠치산이 시거에 불을 붙여주자 시거연기 한 모금을 천장으로 쏘아 올린 왕 회장이 거만하게 말했다.
“섭섭은 무슨! 청장이야 할 만큼 한 거 다 아는데, 단지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그렇지!
내가 지금 그딴 소리나 들으려고 장춘까지 달려온 건 아니고, 앞으로 우리 살길에 대해서 청장하고 긴한 대화를 좀 나누었으면 하는데”
그 사이에 찻잔을 들고 들어온 앳된 공안이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제 버릇 개 못준다고 이번에도 왕 회장의 시선은 허리를 숙이는 비서 공안의 가슴 쪽으로 향했다.
이전부터 종종 있어왔던 일이라 최대한 조심스럽게 허리를 숙이고 있었지만 작정을 하고서 훔쳐보려는 자들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
음흉한 눈빛의 왕 회장이 비서 공안의 가슴이 연상되는 손동작을 하면서 훠치산을 바라보며 개글스럽게 웃어댔다.
매번 반복되는 이런 장면은 청장으로서도 불쾌하기가 이를 데 없었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눈물보가 터져 버릴 것 같은 비서 공안에게 어서 나가라고 눈짓하는 것으로 수습하는 것이 다였다.
오늘도 찻잔을 내려놓기가 바쁘게 휑하니 나가버리자 왕 회장과 훠치산이 한 건 했다는 듯이 큰 소리로 웃으며 청장을 모욕했다.
부하직원 앞에서 무참히도 자존심이 짓뭉개져 버린 청장이었지만 북경의 어른들과 연줄이 닿아있는 왕 회장을 함부로 다룰 수는 없는 일이다.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왕 회장에게 차분한 어조로 되물었다.
“생각해 둔 좋은 방안이라도 있었던가 봅니다?”
왕 회장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능글능글한 표정으로 청장과 눈을 맞추었다.
“우리 아이들의 말이 지금 배은하가 연길시내에 숨어있다는 거야”
“배은하라면?”
순간 왕 회장이 지난 일들이 떠올랐던지 음흉한 미소를 드러내며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 청장의 얼굴을 향해서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을 했다.
“빵!”
청장이 놀란 표정으로 멈칫하자 왕 회장이 낄낄대면서 말했다.
“그 왜 오래전에 이 손으로 보내버린 배 교수 말이요!”
“배 교수라면 왕 회장이 직접 처리하지 않았소?
이십 년도 더 된 일인 것 같은데, 그래서요?”
“거참! 말귀를 대개 못 알아 들어시네,
동북아역사재단의 윤 팀장이란 작자가 이제는 한국정부의 머리통 역할을 하는 모양이던데 그 자의 마누라가 배 교수의 딸이지 않소?”
한국정부의 기획통이라는 윤 비서관의 배우자가 바로 배 교수의 딸이라면?
이번 만세사건의 본질을 한국정부에 의해서 잘 기획된 사건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청장이 오른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면서 재빨리 일어났다.
집무책상 위의 업무용 PC 앞으로 다가간 청장이 배은하의 출입국사실부터 조회해 보았다.
지난달 초 홀로 입국하여 아직까지 출국한 사실이 없으니 자치주 어딘가에 은신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것을 잘만 활용한다면 당국으로서도 한국정부를 반격할 수 있는 건덕지 하나가 만들어지는 것이고 자리보전을 걱정해야 하는 그 자신의 고민거리도 일거에 해소할 수 있는 신의 한 수가 될 수 있었다.
“당신이 어서 공을 세워서 만세사건으로 실축된 과오를 어느 정도는 만회를 해 주어야 내가 북경 가는 길에 윗분들한테 말이나 한번 넣어 볼 텐데,
조선족 만세사건으로 당신 자리도 간당간당하지 아마!”
명색이 길림성의 공안책임자를 상대로 일개 삼합회의 두목 따위가 제멋대로 지껄이고 있었지만 왕 회장의 말은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청장으로서는 실축을 만회할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고 그것은 신속하게 공을 세우는 일이다.
볼일을 끝낸 왕 회장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청장! 당신과 우린 꽌시로 맺어졌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마시오!
당신과 난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공동운명체다 이 말이요”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청장이 덥석 왕 회장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포개어 잡았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왕 회장!
오늘 왕 회장이 귀띔해 준 방책에 대해서는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작품을 한번 만들어 볼 테니까 윗분들한테 말씀이나 잘 넣어주세요,
왕 회장만 믿겠습니다!”
왕 회장이 돌아가자 청장이 직접 수배자명단에 배은하의 이름을 입력시키면서 갖다 붙인 죄목은 ‘출입국관리법 제3조 위반’이었다.
중국에 입국한 외국인은 중국의 법률을 준수하여야 하며, 국가안전을 해치고 사회공공의 이익과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무시무시한 죄명이었다.
이렇게 해서 은하는 공항이던 항만이던 자동차를 통해서든 길림성을 빠져나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불현듯 청장이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표정으로 조선족 자치주의 김일경 공안국장에게 전화했다.
길림성 공안청장의 내밀한 전화를 받은 김 국장은 배은하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배은하라면 당시 동북아역사재단의 윤 팀장과 결혼하여 한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지금 연길시내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배 교수의 딸이 한국대통령과 함께 방중 했던 윤 비서관의 부인이라면?
이후의 고차방정식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조선족 출신으로서 산전수전 끝에 이 자리까지 올라왔을 때는 그만이 가진 동물적인 육감이 있었다.
잘 생각해 보라는 공안청장이 던진 말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린 김 국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이 방책이야말로 자신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 될 것 같았다.
같은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만세사건의 가담자들과 한통속으로 비치고 있는 이 기분 나쁜 상황이 문제였다.
그런데 이 상황을 단번에 반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고 판단하는 순간 그의 얼굴에서는 금세 화색이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