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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Jan 02. 2023

어설픈 물리주의자의 결단

어설픈 물리주의자의 좌충우돌기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육십 중년의 나이가 되어버렸다. 그 세월을 광고라도 하는 듯 휑한 정수리를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도 가슴속에는 청년시절의 열정으로 가득하다. 혈기왕성하던 그 시절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탐독한 이후 우주과학과 관련된 서적이나 영화라면 빠트리지 않는 열성파가 되었다. 딱히 학창 시절엔 과학 공부를 좋아한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지금도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만들어진 신’,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와 ‘위대한 설계’ ‘빅 퀘스천에 대한 간결한 대답’,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구조’, 로버트 액설로드의 ‘협력의 진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셀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 김상욱의 ‘떨림과 울림’을 여러 차례 곱씹으며 반복해서 읽고 있다. 그리고 평소엔 극장을 즐겨 찾는 편이 아니지만 ‘인터스텔라’ ‘마션’ ‘그래비티’ ‘애드 아스트라’ ‘문폴’과 같은 우주과학 영화는 웬만해선 놓치지 않는다.


우리 세대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래된 전통적인 가치관과 MZ세대로 대변되는 미래의 가치관을 다 같이 포용할 수 있는 중간지대 같은 생각이 든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남다른 자긍심도 있다. 생각해보면 황당한 일이었지만 저들끼리 체육관에 모여서 다음번 대통령을 뽑던 말도 안 되는 국가적인 적폐를 바로잡는데 앞장선 세대라는 역사적인 자긍심이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이십 대이던 당시의 오십 대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보수의 중추세력이었지만 요사이는 거의 동률로 나오는 여론조사로 볼 때 그만큼 우리 세대의 역동성을 짐작할 수 있겠다.


영화 인터스텔라가 유독 우리나라에서 흥행했다는 기사를 접하며 묘한 공감의 미소를 머금은 적이 있었다. 지금도 환생과 같은 비현실적인 판타지보다는 현실적인 우주과학에 더 많은 호기심을 느끼는 세대의 일원으로서 말이다. 심장에 뜨거운 피가 들끓던 청년시절 우리 세대는 현실을 회피하는 대신 오히려 엄혹한 현실과 정면으로 맞부닥쳤다. 용감했던 그 시절의 이력 탓이었을까? 차라리 판타지보다는 우주과학에 열광하는 세대가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전통문화에 대해서만큼은 그 태도가 남달랐다. 비록 비과학적인 요소가 배어있다손 치더라도 꾸역꾸역 주어진 소임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성적으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대면서도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문화를 계승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남아있는 마지막 세대로서 말이다. 문제는 이러한 전통문화의 바통을 이어받을 우리 자식들 세대의 미심쩍은 태도다. 자칫 우리 세대를 끝으로 전통문화가 단절될 수도 있겠다는 근심으로 가끔씩 친구들과 이런 류의 대화를 나누다 보면 격의 없는 공감대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과연 우리 아이들 세대에서도 제사와 성묘 문화가 지켜질 수 있을까? 대부분 고개를 가로저으며 쓴웃음을 짓게 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우리 세대처럼 전통과 미래 문화 둘 다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중간에 낀 세대가 감당해야 하는 숙명 같은 것이기에 말이다. 그래서 난 오랜 고민을 끝내고 드디어 모종의 결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오래전부터 물리주의자를 자처하는 몸인지라 관념적으로도 이미 말끔하게 정리가 끝난 상태였다. 비록 어설프지만 왔다 갔다 하는 물결이 아닌 바위처럼 단단한 신념에 바탕한 물리주의자를 자처한 이후 내 생활태도는 엄청난 변화를 동반했다. 마치 혼령이나 신들이 인간들의 일상사에 개입하는 것처럼 말하려는 속삭임을 단칼에 잘라내는 마음의 주체성이 확립되었다.


운명이니 타고난 팔자가 어쩌니 저쩌니, 터가 좋니 안 좋니, 손이 없는 날을 택해서 이사를 해야 한다느니, 동남방향으로 이사하면 쫄딱 망할 수도 있으니 서북쪽으로 가야 한다느니, 심지어는 아이들의 작명조차 간섭하려 들기에 순 한글로 짓겠다고 하여 슬그머니 말문을 닫게 만든 일도 있었다.


연초에 재미 삼아 보는 운세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간혹 지나치게 종교에 심취한 분들이 찾아오면 슬며시 자리를 피할지라도 표정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을 정도의 넉넉함도 생겨났다. 각 문화권마다 사람들의 취향에 맞는 문화가 만들어졌듯이 종교가 태동할 당시의 취지를 생각하면서 성탄절에는 교회의 분위기에, 석가탄신일에는 불교의 분위기에 젖어들 수 있는 차분함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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