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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Jan 09. 2023

‘강림했다 치고!’ 문화의 딜레마

어설픈 물리주의자의 좌충우돌기

우리의 뇌가 최종적으로 작동을 멈추었다면 동시에 그 기능의 작용 현상인 마음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슬픔이나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온전히 남겨진 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죽은 자는 본래 머물던 자연으로 되돌아갔으니 슬픔이나 그리움의 감정 따위를 인식할 주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자아가 사라진 바에는 자신을 불쌍하다고 인식할 수도 없고 남겨진 자들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럴 수 있는 능력조차 사라졌기에 측은하고 불쌍하고 괴로운 마음은 오롯이 남겨진 자들의 몫일뿐 죽은 자와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그래서 남겨진 자들의 마음을 위로하려는 차원에서 죽음과 관련된 여러 문화가 만들어진 것 같다. 비록 육신은 죽었지만 육신과 분리된 영혼이 있다고 상상함으로써 남겨진 자들의 슬픈 감정을 어느 정도는 위안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영혼들이 모여서 산다는 그곳에서 언젠가는 다시금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애끓는 슬픔과 그리움의 마음을 다스리고자 했을 것이다.


불의의 참사를 당하여 사랑하는 이들과 급작스럽게 이별을 고하였다면 매정하게도 과학의 잣대로만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실제로 과학적인 사실 외에는 그 무엇도 터부시 하려는 사회적 분위기라 우리네의 삶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는가? 그래서 일단은 영혼의 존재를 가정하고 그 영혼을 위하여 국화꽃 한 송이를 바치는 분향소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 인간문화의 깊은 정수를 느끼게 한다.


물론 비물질적인 영혼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과학적인 팩트가 맞다. 하지만 사람의 생명을 귀히 여기고 존중하려는 호모사피엔스의 지극히 은유적인 표현까지도 부정할 만큼 현대 과학이 매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은유의 형식이 필요 이상으로 지나칠 때다. 이럴 때 현대 과학은 애당초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 단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 하면서 말이다!


과학문명이 뭔지도 모르던 고대까지는 갈 것도 없이 실제로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영혼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매년 진심을 다해서 제사와 차례를 지내고 성심껏 조상의 묘를 관리했을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이든 그 외의 뭇 생명체든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과학적인 팩트를 대부분 알게 되었다. 단지 오래된 전통이라는 명분 하나로 아직도 죽음의 문화를 과거의 방식 그대로 고집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난 뭐 어설프지만 현대 과학을 지지하는 자칭 물리주의자임을 자부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딱히 유별날 일도 아닐 테지만 그럼에도 한 집안을 대표하는 가장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결국은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로 압축된다. 현대 과학을 신뢰하는 물리주의자들은 간단히 삶의 불가역적인 종결로 정리해버리지만 우리 사회의 전통적인 문화 규범들은 전혀 그렇지가 않은 것이 문제다.


어설픈 물리주의자의 입장에서도 그동안 우리 사회의 오랜 관습에 대해서는 거저 유구한 전통문화로 받아들이며 별 뜻 없이 순응하며 살아왔다. 어린 시절부터 한 집안의 제사장이 되어야 했던 평범치 않았던 환경 탓에 부친의 기일과 두 번의 명절을 합하여 일 년에 세 번씩 집안의 제사를 관장하는 신분이었으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어려운 집안의 경제사정에도 불구하고 벽에 바짝 붙여진 제사상에는 제법 구색이 갖추어졌고 맞은편에 서서 어린 동생들과 함께 큰절을 올리는 의례를 주관했다. 이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혼령이 강림해있다는 대전제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벽에 바짝 붙여진 공간이라고 하더라도 육신이 없는 혼령의 입장에서는 하등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당시의 어린 식견으로도 의문은 들기 마련이다. '암만 생각해봐도 혼령 같은 건 없는 것 같은데 왜 무작정 있다고 치자는 것일까?'

 

어느덧 어린 제사장이 장성하여 가정을 꾸리게 되었고 어설프지만 물리주의자를 자처하는 현실의 삶 속에서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 오래된 관습이라는 명분 하에 별 저항 없이 ‘강림해 있다 치고!’의 제사문화는 그렇게 지속되었다. 이성적으로는 육신을 벗어난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물질 일원주의자를 자처하면서도 굳이 육체와 영혼을 따로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문화는 그대로 유지되었던 거다.


솔직히 말하면 제사상과 차례상을 앞에 두고서는 오랜 전통과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일단은 조상님의 영혼이 강림해 있다고 치고 그냥 그렇게 벽을 향해서 무심한 표정으로 큰 절을 올렸다. 하지만 육신을 벗어난 비물질적인 존재가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이지, 이 말도 안 되는 비과학적인 ‘강림했다 치고’의 제사문화가 대체 언제까지 존속될 수 있겠는가?


평소 낯가림이 심하여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아가는 성품이지만 굳이 이 같은 논란적인 주제를 건드리게 된 것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우리 딸 때문이었다. 어느새 우리 딸이 성장하여 결혼 적령기가 되었던 거다. 몇 년 전 만 하더라도 우리 집의 명절 풍경은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요사이는 잘 먹지도 않는 차례상 음식을 준비한답시고 우리 집의 유일한 며느리인 와이프는 며칠 전부터 파김치가 되기 십상이었다. 명절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김없이 시작되는 와이프의 왕 짜증을 감당하느라 어설픈 물리주의자도 파김치가 되는 일들이 매년 반복되었다.


어느덧 우리 아이들이 장성하여 남의 집 며느리와 우리 집 며느리를 맞이할 시기가 다가오자 어설픈 물리주의자는 생각이 많아졌다. 애지중지 키운 우리 딸이 시집가서 명절날 차례상을 준비한답시고 온종일 부엌에서 전이나 붙이면서 명절을 저주한다면? 그래서 해마다 명절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울릉증이 몰려온다면? 그때마다 난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대면서 다짐했다.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미래의 우리 집 사위가 찾아온다면 초장에 확실하게 다짐을 받아두어야 되겠다고 말이다! 시집을 안 보냈으면 안 보냈지 즐거워야 할 명절이 왕짜증으로 변질되어 명절을 저주하는 불상사만은 막아야 했다. 그런데 남의 집 며느리가 될 우리 딸은 그렇게 해서라도 보호 장치를 마련한다고 치자! 그럼 우리 집 며느리가 될 남의 딸은? 내 딸이 소중한 만큼 남의 딸도 당연히 소중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마침내 ‘강림했다 치고!’의 어정쩡한 봉합 문화를 내 손으로 혁파하리라 결단하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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