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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Jan 16. 2023

며느리도 즐거운 명절

어설픈 물리주의자의 좌충우돌기

며느리도 즐거운 명절?

그렇다, 명절은 즐거워야겠지만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가족의 구성원들 모두가 즐거워야 한다.

만약 가족의 즐거운 명절을 위하여 부엌에서 남몰래 희생을 강요받는 구성원이 있다면 그에게 있어 명절은 자칫 지옥이 될 수도 있겠다.

단 한 명의 빠짐도 없는 가족 모두의 즐거운 명절이 되기 위해선 과도한 차례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지금까지의 관습이 문제였다.

관건은 ‘강림했다 치고’의 차례문화를 과연 혁신할 수 있느냐에 집중되었다.


생각해 보면 시간이 지나갈수록 과학적인 사고를 하기 시작했고, 더 이상은 옛날 방식의 제사문화를 원형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는 오랜 전통문화이니 만큼 그냥 ‘있다고 치자!’는 어정쩡한 봉합이 이루어진 상태라 추정된다.

그런데 미래세대인 MZ세대의 생각을 들어보았는가?

그들의 동의를 구할 수 없는 명절문화라면 이 같은 비과학적인 차례문화가 대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겠는가!

어차피 우리 세대를 끝으로 단절될 위기에 처했다면 차라리 미래세대와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통해서 세대 간의 타협을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 아이들의 구미에도 딱 들어맞는 개혁을 단행하여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들이 앞으로도 쭈욱 계승될 수 있게끔 지혜를 모아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전통문화의 가치를 알면서도 21세기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같은 낀 세대가 감당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

그래서 어설픈 물리주의자가 먼저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향후 천년을 내다보는 대개혁을 단행하는 사안인 만큼 마음을 단단히 다잡았다.

미래세대인 우리 아이들도 쾌히 동의할 수 있는 과학적이면서도 즐거운 명절문화를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이리하여 몇 년 전부터 우리 집안의 명절 풍습은 가히 혁명에 가까운 혁신이 이루어졌다.

지난 추석 명절 땐 기름진 전 종류의 음식은 단 한 장도 만들지 않았다.

추석 하루 전날은 마치 축제의 전야제처럼 모든 구성원들이 마당에 모여서 숯불을 피웠다.

축제에 참여한 가족들을 위하여 집안의 가장이 직접  돼지고기 목살 덩이를 노릇노릇 알맞게 구워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명절 차례상에 올릴 음식의 품목은 참석한 가족들의 의견을 물어서 민주적인 방식으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와이프와 우리 딸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깔끔한 향의 원두커피와 담백한 브런치였다.

명절날 아침, 가족 구성원 모두는 단정한 복장으로 차려입고 정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하는 명절차례식에 참석했다.

강림하신 조상님의 영혼이 없을 진데 차례상을 벽에 바짝 붙여서 차리지도 않았고, 벽을 바라보며 큰절을 올리지도 않았다.


그 대신 집안을 대표한 가장의 정돈된 인사말과 경건한 묵념이 있어 나름 차례의식의 무게감을 더했다.

우리를 이같이 행복한 세상에 나게 해 주신 조상님의 은덕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일동 감사의 묵념!

일분여의 묵념을 마친 후 곧장 명절날 아침의 즐거운 식사시간으로 이어졌다.

드디어 비과학적인 ‘강림했다 치고’의 차례문화가 혁파된 것이다.


우리 집의 두 아들 녀석이 아직 미혼이라 차례식에 참여한 우리 집의 며느리는 없다.

지만 와이프와 미래의 남의 집 며느리가 될 우리 딸의 표정을 통해서 며느리도 즐거운 명절임이 확인되었다.

어설픈 물리주의자는 언제나처럼 식사 후의 과일 깎는 일을 자처하게 되면서 쓸데없는 가장의 권위를 내려놓는 대신 우리 가정의 행복을 선택했다.

 

그런데 차례상의 음식을 흠향할 조상님이 계시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차례라는 형식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 풍습에 동참하려는 보편적인 마음이고,

둘째는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조상님을 추모하려는 진정 어린 마음이며,

셋째는 우리 가족의 정체성을 확인함으로써 끈끈한 연대감을 이어가기 위함이다.

비록 약식이지만 명절날 아침 밥상을 앞에 두고 조상님께 감사의 묵념을 드린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차례상의 음식을 흠향할 조상님의 영혼이 계시지 않을진대 차례상에 차려진 음식을 먹는 이 또한 순전히 우리 후손들이다.

따라서 음식을 먹게 될 우리 후손들의 취향에 맞는 상차림이 준비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명색이 차례상의 음식인지라 평소보다는 정성이 더욱 담뿍 들어간 특별한 브런치를 차려놓고 자연으로 돌아가신 조상님의 은덕에 감사하는 인사를 드렸던 거다.

요사이 후손들의 아침 밥상 트렌드는 기름진 음식보다는 가볍게 먹을 수 있는 담백한 음식이라고 하니 어설픈 물리주의자로서도 따라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조상님의 혼령이 강림하지 않으시니 어쩌면 명절 차례를 지내는 장소가 특별히 문제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장려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씩은 국내외의 여행지에서도 무방할 것 같다.

또 부득이한 사정으로 가족들 간에 떨어져 있다면 서로 다른 장소에서 인터넷 카메라를 활용한 차례의 형식도 괜찮을 것 같다.


우리 딸이 명절을 이용하여 해외여행을 계획한다면 우리 집의 며느리도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단, 고향집을 직접 방문한 자식들과 필리핀 세부에서 인터넷으로 세배하는 자식들 간에는 세뱃돈에 있어 얼마간의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겠다.

그래도 비대면보다야 얼굴을 직접 맞대는 대면 명절이 바람직할 테니 말이다.

그 정도의 차별은 우리 자식들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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