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가는 길 5
이때 익숙한 향기가 다가왔다. 흙의 향기, 나무의 향기, 산의 향기, 그리고 또 다른 향기?
평소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그녀의 향기가 서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혼자 걸으시니 재미가 있으십니까?”
날 따라잡느라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던 모양이다.
은하의 콧잔등에는 몇 방울의 땀이 배어있고 얼굴에는 볼그스레한 홍조까지 피어 있다.
“은하를 생각하고 있었지. 은하 생각하며 걸으니 재미가 있네.”
“농담도 잘하십니다. 오빠가 가보라고 일러주어서 여기로 와 봤습니다.
걸어가시는 모습이 영락없는 선생님 모습이어서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은하도 머리를 내 어깨에 살며시 기댄 채 따라 걸었다.
“위에 있는 저 계곡이 유명한 장백폭포입니다.”
족히 1킬로는 더 가야 할 곳인데도 그곳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우렁찬 물소리가 나의 귓전을 때리기 시작했다.
“은하 오빠가 우리 사이를 많이 도와줘서 정말 다행이야,
오빠마저 우리 사이를 반대했다면, 정말이지 난감할 뻔했는데.”
홍조 뛴 볼에 싱그러운 표정까지 더한 은하가 수줍게 날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가 선생님을 잘 보신 것 같습니다. 사회활동을 폭넓게 하다 보니 대인관계도 풍부하고,
여러 곳을 다니다 보니 세상 물정에도 밝아서인지 사람 보는 안목과 판단력이 빠른 편입니다.
사실은 제가 연변을 떠나 북경으로 가게 된 것도 넓은 세상에서 살아보라는 오빠의 권유가 컸었습니다.
관광회사도 오빠가 주선해 주었고, 북경생활을 하면서도 편리를 많이 봐주었습니다,
오빠는 현실주의자이기 때문에 제가 뚜렷한 미래도 없이 그냥 그냥 사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기 연변에서는 제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오빠는 판단한 것 같습니다.”
드문드문 우리를 앞질러가는 관광객들이 있었지만 늦은 시간 때문인지 내려오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아직도 폭포는 저 멀리 있었지만 폭포수에서 튕겨 나오는 물방울이 날아와 은하의 얼굴에 한두 방울 묻었다.
그것이 재미있는지 은하는 두 팔을 하늘로 뻗으며 폭포수에서 튕겨 나오는 물방울을 온몸으로 맞이했다.
마치 아버지의 높디높은 벽으로 쌓인 근심을 털어내려는 듯 두 팔을 벌린 채 스스로 폭포수를 맞이하기 위해 달려갔다.
마침내 목적지에 다 달았을 때 옷을 흠뻑 적실정도로 장백폭포의 위력은 대단했다.
폭포수 주변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 장엄한 광경 앞에서 탄성을 자아냈다.
오늘날 중국인들은 장백폭포라 부르지만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비룡폭포라 부르기도 했고, 천지폭포, 백두폭포로도 불렀던 바로 그 폭포다.
어느덧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폭포수 주변의 그 많던 사람들도 하나 둘 빠져나가고 이젠 우리 둘만 남게 되었다.
나는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만지다가 돌연 와락 끌어안았다.
이제 내 귀에는 폭포수의 우렁찬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고, 은하의 심장소리만이 가슴을 타고 전달될 뿐이다.
내 품에 안긴 은하도 내 허리를 감싸며 더욱 힘을 주었고 어느 사이에 우린 그렇게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내 가슴에 파묻힌 그녀의 얼굴에서 뜨거운 감촉이 느껴진다.
굳이 물어보지 않더라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행복한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리라.
내가 사랑하는 여인은 날 참 많이 사랑한다는 고백을 이렇듯 고루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내려올 때는 올라갈 때보다도 보폭을 넓게 했다.
은하와 내가 식사시간에 나란히 늦게 나타난 것을 배 교수가 보게 된다면 아무래도 자리가 어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호텔 마당에는 투숙객들을 위한 통돼지 바비큐가 준비되고 있었다.
다행히 창우만 자리를 잡고 앉아 있을 뿐 배 교수와 최 씨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종업원들에게 이것저것을 지시하던 이 사장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처음 볼 때와 마찬가지로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했다.
“윤 선생님, 은하 씨, 어서 오십시오. 산책 다녀오시는 모양입니다.
여기로 앉으세요. 어떻게 주변의 경치는 둘러보셨습니까?”
“예, 천지폭포를 구경하고 왔습니다. 정말 대단한 장관이더군요.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창우가 특유의 미소 뛴 얼굴로 짓궂게 은하를 놀려댔다.
“그래 데이트는 잘하셨소? 오호라, 우리 은하 얼굴이 빨개지는 걸 보니 어디서 뽀뽀라도 하고 온 모양이네.”
“오빠, 남들이 듣겠습니다. 무슨 그런 망측한 농담을 다하십니까?
우린 그저 폭포만 구경하고 왔습니다.”
창우의 넉살 좋은 농담에 은하가 과민반응을 일으키자 창우는 더 큰 소리로 웃으며 놀려댔다.
“역시 온천수는 백두산 온천수가 최고야!
창우야, 뭣이 그리 재미있네? 혼자만 웃지 말고 말 좀 해보라우”
때마침 최 씨가 목에 수건을 걸친 채 다가오면서 큰소리로 웃는 이야기를 말해달라고 졸라댔다.
창우는 최 씨를 바라보며 불에 달구어져서 기름을 뚝뚝 흘리며 돌아가는 통돼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하하, 아저씨. 저 통돼지의 얼굴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자세히 보세요.”
“뭐가? 난 모르겠는데…”
그러자 창우는 한바탕 더 신나게 소리 내어 웃었다.
최 씨는 표정 없이 달구어진 통돼지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재미있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 사장이 창우를 따라서 웃자, 은하와 나도 창우의 재치에 고마워하며 함께 웃었다.
이때, 배 교수도 온천을 했던지 뽀얗게 둔갑된 얼굴로 최 씨 옆자리로 다가왔다.
종업원들이 완두콩이 섞인 밥 한 대접에 시래깃국, 깍두기, 김치, 양파와 반찬들을 가져와 가지런히 세팅하기 시작했다.
이 사장이 직접 통돼지바비큐의 뒷다리부위를 테이블 위에서 자르고 있었을 때 최 씨가 이 사장을 바라보며 말한다.
“이 사장님, 작년에 먹던 백두산 도라지 주 있지요? 고거 한병 부탁합니다.
셋이 먹다 둘이 죽어도 모를 도라지 주 생각에 잠 못 이루는 밤도 많았다우.”
차 안에서부터 노래를 부르며 찾던 그 술을 최 씨가 입맛을 다셔가며 간사스러운 말투로 주문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던지 모두의 폭소를 자아내게 했다.
“네, 밤새 드셔도 될 만큼 많이 담아놓았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최 씨가 그토록 찾는 도라지 주가 도대체 무슨 맛인지 은근히 기대하게 되었을 때 창우가 부연설명을 자청했다.
“윤 선생, 이 집의 도라지 주가 특별한 것은 백두산에서 직접 캔 자연산 도라지로 술을 담는데 말입니다,
한 일 년쯤 푹 묵혀서 귀한 손님들한테만 내놓지요. 다른 집에서는 이 집 술맛을 감히 흉내도 못 내요.
최 씨 아저씨가 작년에 한번 맛을 보고는 껌뻑 가셨지요. 통돼지 바비큐하고는 한마디로 찰떡궁합입니다.
돼지고기하고 같이 마시면 아무리 마셔도 다음날 머리 아픈 게 없어요. 좀 있다가 우리도 한잔합시다. 맛이 죽여요, 죽여!”
고기를 다 쓴 이 사장이 잠시 후 주방을 다녀오더니 큰 술병 하나를 가지고 왔다.
“자 백두산 도라지 주가 왔습니다. 우리 집에 오신 귀한 손님들이시니 제가 한잔씩 따라드리죠.
배 교수님부터 그리고 최 씨 아저씨, 다음은 한국에서 오신 윤 선생님,
그리고 존경하는 우리 배 과장님, 그리고 에~ 또 아름다운 은하 씨도 한잔하시고요.”
이 사장이 은하 이야기를 할 때는 나를 흘긋흘긋 바라보면서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아마도 나와 은하 사이를 약혼자 정도로 오해하는 눈치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따르는 도라지 주는 소주 댓 병 크기의 투명한 유리항아리에 담긴 술이었다.
그 안에는 엄청나게 큰 백도라지 서너 뿌리가 마치 인삼인 냥 도도한 자태를 뽐내며 들어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