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가늘 길 6
이 사장의 제의로 모두는 잔을 부딪쳤다.
단숨에 한잔을 들이켜자 진한 도라지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면서 은은한 깊은 맛이 몸속으로 퍼져나갔다.
단 한잔만으로도 아무 데서나 맛볼 수 없는 귀한 술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산삼도 인삼도 아닌 도라지로 이토록 깊은 맛을 우려내는 술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에는 잘려나간 엄지손톱 모양의 초승달만 저 홀로 외로이 떠있어 자욱이 깔린 어둠을 감당하기가 벅차보였다.
하지만 마당 여기저기 둥근 공 모양의 흰색가로등이 주변을 밝히고 있어 초승달의 부족분을 능히 감당했고, 두 빛의 조화로운 어울림으로 삼삼오오 통돼지바비큐를 즐기는데 그 운치를 더하고 있다.
그런데 어디를 둘러봐도 중국산 맥주 아니면 포도주만 보일뿐, 백두산 도라지주는 우리 테이블 말고는 없었다.
주변정리를 끝낸 이 사장이 이제 막 구운 돼지고기 한 접시를 더 내어 왔다.
“배 과장님, 오늘은 저도 한잔해야겠습니다.”
창우가 이 사장을 자신의 옆자리로 앉으라고 하면서 말했다.
“그래요 이 사장님, 이쪽으로 앉으세요. 자 한잔 받으시죠.”
창우가 따러준 술잔을 단번에 비웠던 이 사장이 이번에는 최 씨가 따러준 술잔마저도 다 비웠다.
그런 후, 뭔가 고민이 있는 듯 심각한 표정으로 창우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 고민을 털어놓을 태세다.
한참을 망설이던 이 사장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우리 호텔을 포함하여 북문 쪽의 호텔을 대상으로 장백산보호개발구 관리위원회에서 철거통지문을 보내왔습니다.
계약기간도 아직 32년이나 남았는데 뜬금없이 나가라고 하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연말까지 자진철거를 하지 않을 경우 철거비고 뭐고 한 푼도 없이 강제철거를 시키겠다고 하니…
협상도 한 번 없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니 도대체 무슨 협박을 당하는 기분입니다.”
창우가 이 사장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도 알고는 있습니다만 걱정이 많으시겠습니다.
백두산의 관리권한이 조선족 자치주에서 길림성으로 이관되었기 때문에 제가 특별히 도와드리기도 그렇고….
어쨌든 이 문제는 나중에 저하고 따로 조용히 얘기하도록 합시다.
사실은 저도 이사장님과 협의할 내용도 있고 하니 말입니다.”
창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최 씨는 이게 무슨 소리냐며 특유의 호들갑을 떨면서 말했다.
“장사가 좀 될 만하니까 중국 사람들이 직접 운영할 욕심이 생긴 게 아니네?
이 사장! 절대로 만만하게 물러서면 안 됩니다.
나중에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일단은 무조건 못 나간다 하고 세게 나가야 됩니다!
그래야 나중에 보상이라도 충분히 받을 것 아닙니까?”
배 교수의 헛기침 한 번으로 최 씨의 호들갑은 일단 진정되었다. 배 교수의 제지가 없었더라면 최 씨의 호들갑은 한동안 계속되었을 것이다.
이 사장이 이번에는 맥이 풀려버린 표정으로 최 씨를 바라봤다.
“예, 지금까지 투자한 비용에 대한 보상은 해주겠다고 합니다만, 백두산을 세계자연문화유산에 등재하겠다는 것과 우리 호텔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저희들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서문 쪽이나 남문 쪽의 호텔은 그대로 놔두고 북문 쪽의 호텔만 철거를 하겠다고 하니 더욱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말을 마친 후에도 이 사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길림성 정부의 처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최 씨가 또 나서려 했지만 이번에도 배 교수의 헛기침이 위력을 발휘했다.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창우가 단 번에 술잔을 비운 후 이 사장의 말을 받았다.
“길림성 정부의 목적은 백두산을 친환경적으로 개발하여 유네스코에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등재하겠다는 것입니다만 이 사장님으로선 참으로 답답하시겠습니다.
그동안 고생고생하시다가 이제야 자리를 잡을 만한데 말입니다.”
창우는 길림성의 분명한 의도와 향후의 계획까지도 알고 있는 듯했지만 그 또한 길림성 조선족 자치주의 고위공무원으로서 길림성이 내세운 명분 이상의 말은 할 수 없는 듯했다.
이때 잠자코 듣고만 있던 배 교수가 도저히 한마디 안 하고는 안 되겠던지 화난 표정으로 두꺼운 검정색뿔테안경을 벗었다.
“뻔한 의도를 가지고 무슨 말들이 그리도 많아!
친환경개발이니 세계자연문화유산이니 쇼들을 하고 있으면 그 좀스런 발상을 우리가 모를 것 같아?”
창우가 배 교수를 정색한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아버지! 또 뭐가 뻔한 의도라는 겁니까? 제발 잘 모르시면서 함부로 말씀 좀 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말씀하실 때마다 제가 가슴이 벌렁거려 아주 죽을 맛이란 말입니다!”
창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배 교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리치면서 고함을 질렀다.
삽시간에 얼굴색이 새하얗게 변해버린 은하는 어쩔 줄을 몰라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서 쳐다보고 있다.
“뭣이 어쩌고 어째? 내가 쥐뿔도 모른다고! 그래 이놈아! 너 말 한번 잘했다.
이 사장! 여기 북문일대에서 호텔사업을 하시는 분들이 모두 우리 동포들 아닙니까?”
이 사장은 자신 때문에 분위기가 살벌하게 변해버렸다고 자책을 하는지 몸 둘 바를 몰라하며 배 교수의 질문에 겨우겨우 대답했다.
“네, 네. 맞습니다. 모두가 따지고 보면 우리 조선동포들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철거통지를 받은 다섯 개의 호텔 중 네 개는 한국 분들이 운영하고 있고, 그리고 하나는 제가 운영하고 있습니다.
여기 일대의 호텔들은 몇 해 전만 하더라도 한국관광객이 손님의 대부분이었으니까요.
조선 사람들 말고는 호텔을 운영할 엄두를 못 냈습니다.
요 몇 년 사이 중국관광객이 많이 늘기는 했습니다만…”
배 교수가 다시 책상을 내리치며 창우를 노려봤다.
“그러니까 내가 이 작자들 하는 짓이 좀스럽다는 겁니다.
백산시 홈페이지에 백두산개발에 대한 목적을 뭐라고 해놨는지 아십니까?
고조선 고구려 발해문제와 간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버젓이 적어놓았어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정치적인 음모가 있다는 겁니다.
황산만 해도 1990년 유네스코에 등재가 됐어요. 그런데 황산 맨 꼭대기에 버젓이 호텔이 서있어요.
세계자연문화유산하고 호텔 하고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는 겁니다.
이 사장!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똑바로 잘 들으세요!
이 작자들의 의도가 뭐냐고 하면, 한마디로 백두산에서 우리 민족의 흔적을 지워버리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동북공정의 일환으로서 백두산공정을 하겠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조선인들이 운영하는 호텔을 없애버리겠다는 저의를 숨기고 있다는 겁니다.”
배 교수와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는지 의식적으로 이 사장만을 바라보며 창우가 또 나섰다.
“이 사장님!, 동북공정이니 정치적 음모가 어떠니 하는 우리 아버지 이야기는 정말이지 새겨들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이야기고요.
아무렴 길림성 정부에서 그런 의도를 가지고 이러겠습니까?
관리위원회에서 보낸 통지문 그대로입니다.
백두산을 친환경적으로 개발하겠다는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 이곳 호텔들을 부득이 철거할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아버지! 내용도 잘 모르시면서 과격한 말씀을 함부로 하시고 그러십니까!
남들도 있는 자리니만큼 오늘은 제발 그만 좀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