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대고려연방 (112)

이중하의 꿈 1

by 맥도강

이제 제법 바람은 서늘했지만 11월 초의 늦가을 태양은 아직도 따가웠다.

모처럼 팀원들과 점심 식사를 함께 하기 위하여 재단 인근의 단골 한식당을 찾았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잠시 마당 한 편에서 볼품없이 지고 있던 한 무더기의 코스모스를 바라봤다.

지난 계절 화려하게 꽃피었을 영광을 뒤로한 채 맥없이 고개 숙인 코스모스의 자태가 자못 처량해 보인다.

불현듯 잠시 잊고 있었던 은하의 얼굴이 떠올라 은하의 채취라도 맡아볼 요량으로 한 움큼의 코스모스 씨앗을 훔쳤다.

주저 없이 코에다 갖다 되고 냄새를 맡아보았지만 뇌리 속에 기억된 그 향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 대신 코스모스 향내를 맡으며 행복해하던 은하의 예쁜 얼굴만 더욱 또렷하게 떠오른다.


이때 국정원의 곽 과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윤 팀장, 지금 어디 계시오?”

“재단 인근의 식당입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이 작자들이 이제야 입을 열었는데 윤 팀장이 지금 대단히 위험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자신들이 실패할 경우는 곧바로 제2진이 국내에 잠입하게 돼 있다는 거예요,

이미 들어와서 윤 팀장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털어놓았어요.

이 자들은 중국에서도 대단히 과격한 삼합회 단체로 알려진 장백산천지단 소속이라고 합니다.

천지회는 음으로 양으로 중국 정부의 후원을 받는 조직이라는데 며칠 전에는 연길에서 상당히 유명한 사학자 한분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분도 윤 팀장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우리 쪽 정보라인에서는 파악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혹시 배 교수님이? 그럴 일이 없다며 머리를 가로저으면서도 왠지 모를 불길한 생각들이 엄습해 왔다.

“윤 팀장!, 오늘부터 우리 쪽 안가에서 지내도록 합시다.

지금 우리 요원들이 그쪽으로 출발했으니 혹시라도 수상한 자가 보이면 일단 자리를 피하고 내게 바로 연락 주시오”


통화를 마치고 주변을 돌아보는 순간 갑자기 현기증이 몰려오면서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급한 대로 우선 화단 앞 벤치에 앉았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눈도 침침해지면서 사물이 서로 겹쳐서 보이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로 가슴이 조여 오면서 머리가 어지럽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를 주시하는 기분이다.

‘배 교수가 돌아가셨다고 에이 아닐 거야’를 반복적으로 되뇌는 사이 현기증이 더욱 심해지더니 구역질이 올라왔다.

이것을 참지 못하고 화단의 코스모스 군락지 사이로 머리를 처박고 헛구역질을 해됐다.

다행히 주변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신물이라도 한바탕 토해내고 나니 현기증이 다소 진정되는 기분이다.


손수건으로 입가 주변을 닦은 후 하늘을 쳐다봤다

2년 전 등신불상 앞에서 내게 경고했던 그 단체가 바로 장백산천지회다.

지금 이들이 나를 해치기 위해서 2진까지 국내에 잠입시킬 정도라면 2년 전의 그 경고가 결코 허튼소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또다시 현기증과 함께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동료들과 함께 있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서둘러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구두를 벗고 마루로 올라서야 하는데 극도의 긴장감 때문인지 구두가 잘 벗겨지지 않았다.

뒤따라서 들어오던 사내가 혹시 나를 위해하려는 자는 아닌지 의심하게 되면서 갑자기 목 주위가 뻣뻣해졌다.

동료들이 앉아있는 안쪽의 구석자리로 걸어갈 때에는 어찌나 바삐 걸었던지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 앉았다.


“팀장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얼굴색이 창백해 보이십니다.”

“아니야 아니야, 별일 아니야.”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을 때에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는 땀 때문에 어느새 와이셔츠도 축축해진 상태다.

차라리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으니 극도로 위축된 심리상태가 조금은 편안해졌다.


오십 여 평 규모의 넓은 홀 안에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이때 출입문 쪽에서부터 잔뜩 날이 선 회칼을 품속에 숨긴 채 나를 향해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사내가 있었다.

공격대상이 나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지만 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미 굳어버린 내 몸은 무방비상태 그대로 벽을 기댄 채 방치돼 있었다.


괴한이 다짜고짜 운동화를 신은 채 빠른 걸음으로 들어오자 손님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그는 주변의 시선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품속에서 번쩍이는 칼을 꺼냈다.

내 옆자리의 팀원들은 어? 어?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벌린 채 그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점심시간이라 인근 회사의 여자 사무원들도 많았는데 그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한쪽 구석으로 피해 달아났다.


이 괴한이 회칼을 빼어 들고 정면 3미터 지점까지 다가왔을 때였다.

그 앞의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있던 손님 두 명이 동시에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났다.

일어남과 동시에 한 사람은 손에 들고 있던 신문지 뭉치로 회칼을 든 손을 내리쳤고, 또 한 사람은 맨 손으로 괴한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두 사람의 동작이 얼마나 빨랐던지 조금 멀리 떨어진 사람들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할 정도였다.


괴한은 쓰러질 듯 말 듯 한쪽으로 비틀거리면서도 이내 중심을 잡고는 출입구 쪽으로 뛰어 나갔다.

이 모든 일이 불과 1분도 안 되는 사이에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다.

나를 살려준 두 명도 괴한의 뒤를 따라서 밖으로 나갔지만 그를 추격하려는 의도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제야 식당 안은 비명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가는 소리, 밥상이 넘어지는 소리, 어린아이 우는 소리로 난장판이 되었다.


이때 국정원 요원들이 들이닥쳤지만 나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들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요원 하나가 나를 일으켜 세웠을 때 난 절반쯤은 혼이 나가버린 사람이 되었다.

“과장님께서 안가로 모시라고 했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함께 가시죠.”

비상한 상황에서 나의 선택권은 없었다.

그들의 차에 실려서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을 때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불현듯 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어디선가 귀에 익은 컨츄리 송이 울려 퍼졌다.

음률이 반복되는 것으로 봐서는 누군가의 휴대폰 벨소리 같은데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윤 팀장님, 전화받으시죠?. 팀장님의 휴대폰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운전을 하던 요원의 재촉을 받고서야 난 잠에서 깨어났다.

단 몇 분의 단잠에 불과했지만 마치 몇 시간을 잔 것처럼 깊은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다.


휴대폰의 화면을 보니 발신지가 표시되지 않는 전화가 계속 울려대고 있었다.

“여보세요?”

“윤 선생!, 아무 말 마시고 듣기만 하시라요.

방금 우리 쪽 동무들이 선생의 목숨을 구했을 겁니다.”

“옛? 그럼 누구?…”

“듣기만 하시라요. 지도자 동지께서 윤 선생을 보호하라는 특별한 지시를 내리셨단 말입니다.

장군님께서는 이번에 윤 선생의 애국적인 행위에 대하여 크게 치하하셨습니다.

그런데 선생, 명심하시라요!.

장백산 천지단 아새끼들은 한번 공격목표로 정하면 절대로 포기하는 법이 없는 독종들입니다.

길게 말할 수는 없갔지만, 저놈들 뒤에는 중국 정부가 버티고 있어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들이 매번 선생을 지켜드릴 수가 없으니 차라리 국정원 쪽의 보호를 받으시라요.

우리 민족이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선생이 반드시 무사하셔야 됩니다. 고럼!”


비몽사몽간에 전화를 받아서인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럴 때 조수석에 앉은 요원이 귀를 쫑긋거리는 표정으로 무슨 전화냐고 물었지만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차는 고풍스러운 덕수궁 돌담길의 운치를 구경하면서 끊임없이 돌고 돌았다. 마치 어디론가를 향해서 미로 찾기를 하는 듯하다.

어느 순간 차는 4차선의 대로변을 질주하고 있다. 정신을 차려보니 경희궁 앞을 지나쳐서 광화문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길을 건너는 행인들을 기다리느라 잠시 횡단보도 앞에서 정차하는가 싶을 때였다.

갑자기 삼십여 미터 후방에서 덤프트럭 한 대가 무서운 기세로 질주해 왔다.

불과 2 ~ 3초의 짧은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피하나 싶었는데 순간적으로 “꽝!”

고통조차 느낄 겨를도 없이 그것으로 모든 것이 중단돼 버렸다.

갑자기 암흑의 천지로 변하더니 깃털처럼 그냥 내가 사라져 버렸다.

이 세상천지에서 이제 나를 느낄 수 있는 자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천 길 만 길 낭떠러지로 떨어진 것 같았다.


얼마의 시간이 더 지났는지도 모른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매캐한 소독 냄새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몸을 움직일 수도, 볼 수도 없었지만 단지 후각으로만 느낄 뿐이다.

나는 어느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의식 없는 다른 육신들과 함께 침대 한 칸씩을 차지한 채 누워있다.

산소마스크를 통해서 숨을 쉬고, 목으로 호스를 꽂아 강제로 가래를 뽑아내고 있다. 혈관주사를 통해서 영양분을 공급받아 겨우 생명을 유지하는 중이다.

가끔씩 내가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당직 의사가 랜턴을 비추며 눈을 들여다볼 때를 제외하면 보통 때는 적막강산처럼 조용하다.

또 잠이 오기 시작한다,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어느 사이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난 캄캄한 절벽 위를 조금씩 기어 올라가고 있다.

이렇게 죽을힘을 다해서 용을 쓰고 있지만 사실 하루에 단 한 발짝 올라서기도 어렵다.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현기증이 나서 그냥 몇 시간을 그대로 쉬어야 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순간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까마득한 하늘에서 가느다란 빛줄기 하나가 보이기 시작한다.

서 교수님의 손길이 뼈만 앙상하게 남은 내 얼굴과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아이고 이 사람아!. 이제 그만 털고 일어나야지. 벌써 두 달째 이러고 있으면 어쩌나, 이 무심한 사람아!.”

서 교수님의 눈가에 맺힌 뜨거운 눈물을 난 교수님의 따듯한 손길로 느낄 수 있었다.

내 오른손을 꼭 부여잡고 계시는 교수님의 양손에서 전류를 타고 뜨거운 열기가 내 손으로, 가슴으로 전해진다.

“내가 일전에 자네에게 말한 적이 있었지, 연초에 세미나 참석차 북경에 다녀온다고, 그래서 이번에 가게 되었네.

내 돌아오는 길에 연변에 한번 들러볼 생각이야. 배 교수란 양반도 만나보고 또 은하라고 했었지?

그 왜 자네가 색시감으로 점찍어두었다는 처자 말이야. 가는 길에 꼭 만나보고 돌아오겠네.

내가 다녀올 때까지 우리 조금만 더 힘을 내어 보자고. 그래서 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지 이 사람아!.

자네 나하고 꼭 약속하는 거야, 응?”

서 교수님이 내손을 힘껏 부여잡아주신 덕분인지 희미하게만 느껴지던 내 심장의 박동소리가 조금씩 생기를 되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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