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맥도강 Mar 04. 2023

문화강좌에 가듯 가볍게

어설픈 물리주의자의 좌충우돌기



어설픈 물리주의자가 어린 시절부터 목격해 온 기도의 의미는 소박한 인간들의 일상적인 문화현상이었다. 꼭두새벽, 우리네 어머니들은 부엌에서 정안수 한 그릇을 떠놓고서 가족의 무사안일을 기도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보면서도, 길을 걷다가 아름드리 고목나무를 만나더라도 마음을 정갈히 한 채 기도를 올렸다.  


수능을 앞둔 수험생 어머니들의 간절한 기도의 의미를 생각해 보라! 따지고 보면 절에서든, 교회에서든, 이른 새벽 부엌에서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어머니들의 마음은 별반 다르지 않았을 터, 기도의 효험 여부를 떠나서 우리네 어머니들의 심란한 마음은 다소나마 위안받을 수 있었다.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서라도 자식을 응원하고픈 이 세상 어머니들의 마음 앞에서는 거저 숙연한 마음이 들뿐이다.

  

어설픈 물리주의자의 지인들 중에서는 평생에 걸쳐서 종교생활을 참으로 반듯하게 열심히 하는 분들이 있다. 그들 대부분은 합리적인 성품을 바탕으로 사회생활 또한 왕성하게 잘하는 편이다. 편한 자리에서 대화할 땐 스님과 목사님 앞에서는 돈 자랑하지 말라는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종교가 없는 나와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렇듯 종교가 있든 없든, 종파가 무엇이든, 종교로 인한 갈등상이 흔치 않은 넉넉한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퍽이나 다행스럽다. 사람마다 가치관과 성향이 다르듯 각자의 종교생활도 존중하면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정신적인 풍성함에 크게 안도하게 된다.

 

종종 외신을 통해서 접하게 되는 종교로 인한 갈등상은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신앙생활을 대단히 심각한 방식으로 하고자 하는 극단주의자들의 공통점은 경직성일 것 같다. 단지 마음을 위로받기 위하여 시작된 신앙생활이 차츰 그 도가 지나쳐서 경전 속의 문구들을 액면 그대로 믿어버림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로 추정된다. 당초의 취지와는 다르게 오히려 사람들을 지배하려 드는 주객이 전도된 이상한 상황이라 하겠다. 

    

종교와 과학의 조화로운 동거에 성공한 우리 사회의 심플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코로나 초창기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종교지도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대통령은 분명한 어투로 말했다. 코로나를 대처하는 것은 과학의 영역으로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영역을 담당하는 종교계가 잘 협조해 달라는 당부를 하였고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늘날 종교와 과학 사이에서는 일종의 신사협정을 맺은 듯 서로의 영역을 최대한 존중하려는 입장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안에서는 영역의 구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일방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코로나든! 불의 고리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끔찍한 자연재해든! 사람들의 부주의로 초래된 불의의 참사든! 국가 간의 이기심으로 발생하는 참혹한 전쟁이든! 인플레이션에 따른 경제위기든! 현실에서 부닥치게 되는 거의 대부분 어느 것 하나라도 과학의 영역을 벗어날 수가 없음이다. 따라서 그 원인과 해법역시도 과학적으로 접근하여 과학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과학의 문제일 뿐이다. 


종교의 역할은 단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 줄 따름이지 수능시험을 잘 치르는 것도 수험생 개인의 몫이요, 코로나를 잘 극복하는 것도 오롯이 과학방역에 동참하는 성숙한 시민들의 몫이다.


진실이 이러함에도 현실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일일이 신을 개입시킴으로써 숨이 막혀서 질식할 것만 같았던 중세를 우리는 암흑시대라고 부른다. 모든 것을 신의 뜻이라는 미명 하에 자신들의 생각만이 정의요 진리라고 단정하면서 여타의 다른 생각들을 배척한다면 이 얼마나 공포스럽고 억지스럽단 말인가?


그에 반해서 일상적으로 목격하는 우리 주변의 신앙인들은 마치 홀가분한 마음으로 구청의 문화강좌에 가듯 그렇게들 가볍고 경쾌하다. 다른 이들이 수강하는 이웃의 문화강좌를 편안한 마음으로 구경하면서 그들과도 사이좋게 잘 지낸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신의 존재 여부조차 의심받는 상황이 되었지만 그러든지 말든지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다들 마음들이 쿨하다. 설사 신이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그래서 영혼이나 천국이 실재하지 않을지라도! 신앙생활을 통하여 거저 내 마음이 안정되고 삶의 질 향상에도 도움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한다는 태도는 지극히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마치 우리네 어머니들처럼…    

  

현대 과학을 신뢰하는 어설픈 물리주의자의 입장에서도 딱히 우리 사회의 종교인들에 대해서는 편견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다만 음악방송을 듣기 위하여 라디오의 채널을 돌리다 보면 간혹 종교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멘트에 살짝 심기가 불편해지는 경우는 있지만…

‘배우자는 예정되어 있나요? 나는 왜 이렇게 생겼나요? 우리 아이는 왜 아픈가요? 가 궁금하다면 가까운 신학자나 목사님에게 물어보세요?’


뻔한 답변이 아니길 기대하지만 그들의 대답이 살짝 궁금해지기는 한다. 아마도 우리 인류가 집단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런 유형의 질문들은 끊임없이 반복되었을 것 같다. 과학문명 이전의 시기에는 십중팔구 타고난 팔자가 어쩌니 하면서 사람의 운명을 주관하는 신을 등장시켰을 것이다. 그리하여 죽음 이후의 극적인 반전을 조건부로 제시하면서 고분고분 자신의 불행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했을 것 같다.


이런 방식으로 고대사회의 지배자는 통치 질서를 수립했을 것이고 종교 상업주의가 태동하는 강력한 동기로 작동하지 않았을까? 과학문명의 발전과 함께 확실히 이러한 비과학적 현상들도 조금씩 흐려졌겠지만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민간요법에 대한 주의사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