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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Jun 03. 2023

아인슈타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동화 이야기

어설픈 물리주의자의 좌충우돌기

1929년 유대교 랍비 골드슈타인이 아인슈타인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문을 돌직구로 날렸다.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 50 단어로 답변해 주십시오? 회신료는 선불되었습니다"

이 질문에 아인슈타인은 25 단어로 된 독일어로 답변했다.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법칙적 조화로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스피노자의 신은 믿지만 인류의 운명과 행동에 관여하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지인에게 쓴 편지를 통해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적 종교적인 관점을 솔직하게 가감 없이 드러냈다.


"성서는 훌륭하지만 상당히 유치하고 원시적인 전설들의 집대성이며, 아무리 치밀한 해석을 덧붙이더라도 이 점은 변하지 않는다"


"우주가 이해가능하고 법칙을 따른다는 사실은 경탄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조화를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신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두 종류의 신이 있다. 우리는 굉장히 과학적이어야 하고, 정확한 정의를 내려야 한다. 만약 신이 우리와 함께 하는 인격적인 신이라면, 그리고 바닷물을 가르고 기적을 보이는 신이라면, 나는 그러한 신은 믿지 않는다. 크리스마스에 자전거를 사달라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신, 이런저런 소원을 들어주시는 신이라면 나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질서와 조화, 아름다움과 단순함 그리고 고상함의 신을 믿는다. 나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는다. 왜냐하면 이 우주는 너무나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자연밖에서 독야청청 홀로 존재하는 인격적인 초월자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 간다. 그 대신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신령한 기운으로 바라보는 스피노자의 범신론적인 관점을 지향하게 된다. 고문서에 등장하는 천국과 지옥의 내세관은 사람들의 상상이 만들어낸 가상의 공간임을 1 나노미터만큼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내게 주어진 인생의 배터리 가운데 이미 70%를 소진한 시점, 저 멀리서 성큼성큼 죽음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물리주의자로서의 철학적 소신이 더욱더 단단해짐을 느낀다. 


깊은 사유 끝에 아인슈타인이 이해한 우주는 유한하지만, 경계나 끝도 없고, 가장자리나 중심도 따로 없는 모습이었다. 무한한 우주였다면 중력과 모든 방향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의 양도 무한대가 되기 때문에 불가능하고, 한 위치의 공간에 떠있는 유한한 우주는 별과 에너지가 우주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줄 수 없기 때문에 역시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아인슈타인은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우주의 실체를 알게 되면서 어떤 신실한 종교인이 가졌던 경외감보다도 깊은 경외감으로 우주를 바라보게 되었다. 나 또한 어설프지만 물리주의자의 한 명으로서 우주를 이해하는 아인슈타인의 관점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마음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일 뿐 내세관이든 우주관이든 사람들마다의 생각은 다양할 수 있음을 활짝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말로만 듣던 기이한 이야기의 실상을 PD수첩 방송을 통해서 처음으로 접했다. 명문대학을 나온 미스코리아급의 훤칠한 아가씨가 직접 경험한 바를 틀어놓았을 때 난 머리가 지끈거리는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방에서 자칭 메시아라는 사람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칠순을 넘긴 사내의 손길이 자신의 몸을 더듬거렸을 때 엄마는 연신 ‘감사합니다’를 되뇌었다고 한다. 이윽고 추잡스러운 사내의 손은 심지어 엄마에게도 향했다. 딸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엄마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그 상황에서 감사합니다가 뭐냐고!'

     

방송을 보는 내내 숨이 턱턱 막혀왔다. 나 또한 딸자식을 둔 부모의 한 명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솔직히 역겹기까지 했다. 일반적인 부모의 심정이라면,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당연히 불한당 같은 작자의 뺨이라도 후려치고 못된 손모가지를 분질러도 모자랄 판국에 '감사합니다!'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어쨌든 생각의 다양성을 인정하기로 했으니 최대한 인내심을 가지고 이런 추잡스러운 행위조차도 '감사합니다!'로 응대하는 엄마의 심리상태를 이해해 보기로 했다. 


다른 나라의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유독 우리나라는 자신을 메시아라고 소개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현실이다. 좌우지간 딸의 엄마가 이 불한당 같은 사내를 진실로 메시아라고 생각했다면? 사내의 기이한 행동조차도 어떤 숨겨진 종교적인 의도로 이해하고 싶었을까? 세부적인 내막은 알 수가 없지만 뭐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딸의 엄마가 이 자를 통하여 성취하고 싶은 간절한 그 무엇이 궁금해졌다. 사내의 이런 추잡스러운 행위조차도 묵인될 만큼의 간절함이라면 육신의 생존기에 달성할 수 있는 그 무엇은 아닌 것 같다. 재물이나 건강, 사회적 지위의 출세 따위를 성취하기 위하여 치욕스러운 딸아이의 성적수치심을 내 몰라라 할 엄마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것을 능가할만한 그 무엇이라면? 암만 생각해 봐도 육신의 죽음 이후에도 영원한 행복을 보장한다는 천국정도의 보상책 정도가 아닐까 짐작된다. 자신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메시아로 철석같이 믿었다면? 모녀를 동시에 성추행하는 이런 추잡스러운 행위조차도 '감사합니다!'라고 읊조릴만한 메시아의 은총으로 변질될 수 있었을까?  


천국으로 직행하려면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추천장이 있어야만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뭐 까짓 껏 그렇다고 치자! 딸의 엄마가 이런 정도의 도덕적 함양을 지닌 자를 메시아라고 생각하게 된 연유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고 또 관심도 없다. 다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보통의 엄마라면 피가 거꾸로 솟꾸칠 만한 상황에서도 간절하게 갈망했던 천국에 대한 집념이다.   


대체 얼마나 좋은 곳이길래 그토록 갈망하게 되었는지,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를 못하는 성미인지라 한번 알아나 보기로 했다! 몇 시간 동안 화품을 쩍쩍해대면서 천국을 소개하는 온갖 종류의 인터넷 자료와 유튜브를 섭렵해 봤다. 침침한 눈가를 비벼가면서 억지로 쳐다보려니 피곤하여서 눈알이 다 빠질 정도다. 인간의 상상력으로 화려하게 세팅된 여러 종류의 천국을 구경해 보았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라고 하더니만 그래도 어린 시절 주일학교를 다닐 때의 천국은 평안했고 포근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육십을 바라보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 한 인간의 시각으로는 솔직히 불편한 감정만 가득하다.


설사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CG팀이 만든 천국이라 할지라도 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천국을 그려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오래된 고문서를 바탕으로 최첨단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취향에 적합한 유토피아를 도안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테니 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반복되는 전쟁과 자연재난 속에서 하루하루를 무척 고달프게 살아가던 고대나 중세인이었다면 고문서 속의 천국을 훨씬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일상적인 불안과 위험, 질병과 굶주림, 계급제도에 따른 비인간적인 착취와 살인적인 노동에 시달리던 척박한 환경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시대적 환경에서는 단순히 안전하고, 배불리 먹고, 편히 쉬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유토피아가 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모든 것이 안정된 21세기 과학문명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을 만족시킬만한 유토피아를 설계한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 같다. 그것도 정해진 기한도 없이 그곳에서 영원히 살아야 한다면 '리처드 도킨슨'의 지적대로 천국을 디테일하게 설명하기가 엄청 어려울 것 같다. 간단한 스케치정도로 대충 넘어가야지 천국에 대하여 꼼꼼하게 설명하다가는 영원이라는 단어 속에 내재된 그 따분함과 지루함을 무슨 수로 극복할 수가 있겠는가? 특히 나처럼 질문이 많은 까다로운 물리주의자 앞에서 천국을 세밀하게 설명하다가는 혈압이 올라서 제풀에 쓰러지고 말 테니까.


사람들마다의 취향에 따라서는 분명히 호불호가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보여주는 정도의 상상력으로는 현대인들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는 없을 듯하다. 적어도 아인슈타인이 우주를 이해했던 철학적, 종교적인 관점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천국행 열차에 몸을 싣지는 않을 듯하다. 수천 년 전의 마인드로 설계된 따분하기 짝이 없는 공간에서 그것도 영겁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면 손사래를 치면서 도망치고 싶을 테니 말이다.      


자신의 딸 앞에서 살이 떨리고 피가 솟꾸치는 수모를 감수하면서도 기어이 천국에 가고 싶다는 엄마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음흉한 사내의 손길이 딸에게로 향하고 있었을 때 불현듯 천국에 대한 갈망이 나정도의 수준으로 시큰둥해졌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십중팔구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필사적으로 대항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딸의 엄마는 대체 어떤 사정으로 천국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되었을까? 어쩌면 어린 시절 주입되었던 이분법적인 양자택일의 영향 탓일 수도 있겠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오직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 천국에 갈 수 없다면 너는 지옥행이다!" 

이렇게 교육받았다면 지옥에 대한 공포심으로 말미암아 무작정 천국을 갈망하게 되지 않았을까?


따지고 보면 이 세상은 흑과 백만 존재하는 단편적인 세상이 아니다. 흑백의 중간인 회색도 있고 빨주노초파남보의 여러 다양한 색상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단편적으로 흑과 백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려는 이분법적인 생각이 늘 문제가 된다.  굳이 동화 같은 천국과 지옥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그냥 깔끔하게 자연 속으로 사라질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면 저토록 맹목적으로 천국을 갈망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자 이제 천당과 지옥이 설계된 연유를 한번 따져보자. 애당초 누군가의 의도로 천당과 지옥이 설계되었다면 설계자의 의도가 궁금해진다. 살아생전 지었던 죄는 죽어서라도 반드시 책임진다는 것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던 사회분위기였다면 그야말로 지옥의 효용가치는 컸을 것 같다.


이제 천당행과 지옥행의 갈림길이 되는 항목들을 규정할 차례다.

1)… …

2)… …

3)… …

등등


고대왕국의 통치자 내지는 부족사회의 지도자가 이러한 항목들을 결정할 수 있었다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공동체의 사회질서를 확립하려는 거창한 명분이 있지 않았을까? 어릴 적부터 소속 구성원들에게 이러한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반공동체적 행위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는데 꽤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인과응보’ ‘사필귀정’ 단편적으로 원인과 결과를 이어주던 인과론적인 관점은 거시적 차원의 자연법칙과도 잘 맞아떨어졌지만 물질의 기본 단위인 원자들의 세계에서는 전혀 달랐다. 자신 있게 필연을 말할 수 있었던 고전역학과는 달리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불확실성 내지는 단지 몇 퍼센트의 확률만으로 말하게 되면서 더 이상 인과론이 통하지 않았다.


물론 우리 인간들만이 육신의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우리 지구가 우주의 중심으로 설정되었던 천동설을 진리로 받아들이던 당시와 비교해 보면 확실히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따라서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고대에 설계되었던 지옥이라는 단어가 차지하는 심리적인 두려움도 예전만 못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범죄율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지옥행으로 나열된 항목의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면 지옥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던 당시와 비교했을 때 범죄율에서는 특이할만한 변화가 있었을까? 뭐 이런 종류의 여론조사 데이터가 남아 있다면 모를까 딱히 당시와 현재를 비교 분석할 만한 마땅한 방법은 없을듯하.

"당신은 지옥을 믿습니까? 지옥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고 싶은 욕망을 억눌러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 지옥이 없다면 지금보다도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범죄를 저지를 것 같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지옥행이 결정되는 기준을 누가 어떤 의도로 결정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많이 달라질 것 같다는 거다. 모든 사람들이 쾌히 승복할 수 있는 공명정대한 지옥행의 기준을 정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될 것 같지만 대개의 경우는 설계자의 사심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가령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식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합리화들이 만연해있었다면 딱히 지옥행이 두려워서 공동체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들을 자제했을 것 같지는 않다.


어떤 이들에게는 살아있는 생명체를 몽땅 거리 죽이더라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면 생명의 존엄정신이 모든 생명체에 보편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았다는 반증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고대나 중세를 살았던 사람들이 느꼈을 법한 극한의 공포심이 몰려온다. 


일설에 의하면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죽음의 바로 직전에서야 세례를 받았던 이유가 천국행을 위한 꼼수였다고 한다. 일생동안의 모든 죄에 대하여 한꺼번에 탕감을 받은 후 곧바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천국으로 가는 가장 안전한 지름길로 인식했다는 거다. 당시 로마 상류층들의 인식이 고작 이런 정도의 수준이었다면 아무리 천동설의 관점에서 최적화된 신이었다 할지라도 신의 수준을 너무 낮추어서 보는 것 같아 씁쓸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딱히 당시와 현재를 비교 분석할 수 있는 마땅한 데이터가 없는 실정에서는 지옥에 대한 믿음의 여부가 범죄의 발생빈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가 없겠다. 하지만 위의 사례들처럼 지옥행의 기준점을 설정하면서 상층부로 갈수록 자기 편의적이고 치졸한 꼼수들이 만연해 있었다면 지옥의 효용가치가 그다지 높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현대 과학이 밝혀낸 결론은 참으로 간결하면서도 담백하다. 우리 인간들 역시도 다른 뭇 생명체들처럼 딱 한 번의 인생만 존재할 뿐, 천국에서든 지옥에서든 또 다른 삶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공익에 반하는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합당한 처벌을 회피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딱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내게 그만한 힘이 있었어 내가 하면 정의요, 다른 사람이 하면 불의가 되게끔 나의 행위를 공익적인 행위로 포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냥 운이 좋아서 들키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다.


죽음과 동시에 모든 것이 끝이 난다면 생전에 지은 죄를 심판받을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인과응보니 사필귀정이니 하는 말 자체가 모두 허사가 되고 말겠지만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것인가! 지옥이 없기 때문에 마음대로 약한 자를 괴롭히고, 망신 주고, 빼앗고, 때로는 끔찍한 살인까지도 저지르고 싶다는 말이가?


700만 년 전 우리 인류의 조상이었던 침팬지 무리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 공동체의 이익을 해하려는 행위에 대하여는 그들이 구축한, 그들 나름의 엄격한 규율로서, 그들 공동체의 질서를 잘 유지해오고 있다. 반면에 우리 인간사회는 훨씬 더 방대하면서도 촘촘한 법질서와 사회제도를 발전시켜 오지 않았는가! 암만 생각해 봐도 그깟 동화 같은 지옥 이야기를 폐기 처분하다고 해서 딱히 범죄가 더 늘어날 것 같지는 않다.   


천국과 지옥이 등장하는 동화 이야기가 됐든, 그냥 깔끔하게 자연 속으로 사라지는 과학 이야기가 됐든,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들의 취향에 따라서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을 뿐이다. 그것은 자유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취향을 다른 누군가에게 강요하는 것은 곤란하다. 설사 그것이 자신들의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난 아인슈타인처럼 초월적인 인격신을 부정하면서도 우주, 자연 그 자체를 경외해 마지않는 스피노자의 신관을 받아들인다


아울러서 개인의 철학적, 종교적 다양성이 보장되는 21세기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무척 행복하고 다행스럽다. 숨 막히는 고대나 중세였다면 당시 구축된 사회질서에 반하는 개개인의 다양성이라는 가치는 언감생심 상상도 할 수 없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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