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대고려연방 (159)

마지막 보고서 1

by 맥도강

상윤보다는 일 년 늦게 연방정부 총무처가 주관하는 행정고시에 합격한 진숙은 꿈에 그리던 연방정부의 5급 사무관이 되었다.

2033년이 끝나갈 무렵 신입공무원 연수교육을 마친 그녀가 받아 든 첫 발령지는 놀랍게도 정 위원장의 관사였다.

연방정부차원에서 정 위원장을 보다 더 세심하게 보필할 목적으로 집사공무원을 파견하기로 했던 것이다.

영민하면서도 매사에 진중함을 잃지 않던 진숙이 가장 어려운 보직을 수행할 첫 연방공무원으로 낙점되었다.


혹독한 겨울을 물리치고 따듯한 봄의 기운이 찾아오듯 대고려연방의 정국도 모처럼만에 안정기를 구가했다.

2034년 3월의 태양은 얼어붙은 대고려연방의 대지를 깨우고 있었지만 정 위원장만큼은 일체의 바깥출입을 삼간 채 온종일 서재에서만 지냈다.

2년 전 인민공화국 정부가 해산되고 부부의 손으로 가꾸기 시작한 마당의 정원도 이제는 흥미를 잃었던지 일손 보태기를 마다하고 있었다.

여전히 정원 가꾸기에 분주한 부인의 모습을 멍하니 서재에서 바라만 볼 뿐 무슨 생각이 그리도 많은지 깊은 사색에 빠져들었다.

대문 밖은 또다시 억울한 사정들을 호소하는 각종 민원단체들이 북쪽 전역에서 밀려들어 장사진을 이루었다.

관저의 경비업무를 담당하는 연방경찰들은 이들의 진입을 막느라 온종일 진땀을 흘렸다.


작년 가을 정 위원장의 결단으로 헌법재판소 문제가 마무리된 후 평화가 찾아온 듯했지만 그것은 온전한 평화가 아닌 일시적인 평화였을 뿐이다.

대문 밖의 소란은 이젠 거의 일상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아갔다.

오늘도 종업원지주사로 전환된 식료품 제조사의 종업원들이 떼로 몰려와서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거래하던 남쪽기업의 갑질 횡포로 회사가 도산위기에 몰렸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기업의 운영시스템에 미숙한 북쪽의 종업원지주사들이 이런 식으로 하나둘 남쪽 기업사냥꾼들의 먹잇감이 되어갔다.

이런 사건들은 이제 북쪽 다섯 개 주에서는 뉴스 축에도 들지 못할 정도로 비일비재하게 만연해 있었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들었다 났던 부동산사건 이후 남쪽사람들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민심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그럴수록 북쪽 사람들의 정 위원장에 대한 의존감은 날이 갈수록 커졌고 정 위원장의 관사 앞에는 늘 이렇게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민심의 집합소가 되어갔다.

이들이 들고 나온 현수막들 가운데는 급기야 통일을 후회하는 문구들까지 등장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런 분위기가 서서히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자칫 정 위원장의 관사가 반통일의 진원지로 인식될 수도 있어 정 위원장은 지금 이 같은 난처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장고에 들어갔다.


정 위원장 내외가 막 아침식사를 시작하려고 할 무렵 곽 사령관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위원장님 큰일 났습니다, 이것 좀 보십시오!

박철, 이 치졸한 자식이 위원장님의 존함을 함부로 도용해서 이따위의 전단지를 뿌려 대고 있습니다,

위원장님께서 북조선재건회의 간부들을 불러서 격려했다고 하는 전단지입니다,

오해하는 인민들이 생길까 봐 걱정입니다!”

전단지를 불끈 쥔 정 위원장의 두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박철, 이 놈이 기어이 날 사지로 몰아넣고 있단 말이지,

어때! 퇴역 장성들의 분위기가 지금 어떻냐 말이야?”

심기가 불편해진 정 위원장이 다그치듯 묻자 경직된 표정의 곽 사령관이 군기가 바짝 들은 차렷 자세로 말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군원로들은 총사령관님께서 재건회의에 무언의 지지를 보낸다고 믿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 사건 이후 총사령관님께서 연방정부에 등을 돌렸다고 믿는 자들이 늘어났는데 총사령관님께서 격려의 말씀을 하셨다는 전단지까지 뿌려지자 사실로 믿는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정 위원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제는 내 신세가 고작 박철 따위가 가지고 노는 노리개 신세로 전락되었단 말이지!”

정 위원장의 자조 섞인 푸념소리에 화들짝 놀란 곽 사령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박철이 놈을 제외하면 총사령관님을 그렇게 생각하는 인민들은 단연코 아무도 없습니다!”

“됐어! 당신한테 그런 소리나 듣자고 하는 말은 아니니까!”

정 위원장은 또다시 창밖의 정원을 바라보면서 어금니를 깨어 물었고 치밀어 오르는 노여움을 겨우 진정시켰다.


정 위원장이 북조선재건회의를 추인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이렇게 되자 북쪽 다섯 개 주에서는 재건회의에 가입하려는 청년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시월이 되어서는 북조선재건회의가 자치주의 군 단위에까지 지부를 둘 만큼 그 세력이 확산되어 갔다.

적어도 북쪽 다섯 개 주에서는 연방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반연방 시민단체로 급성장했다.


백두산의 서문, 장백산천지회의 왕 회장 사무실은 요즘 들어서 부쩍 활기가 넘쳐나고 있다.

북경의 늙은 능구렁이 허 원장을 제치고 왕 서기라는 상무위원과 직접 소통하고 있었으니 이제 그들 앞에는 그칠 것이 없었다.

5년 전 배은하가 장백산을 넘어 대고려로 도망쳤을 때만 해도 사실상 조직이 와해될 위기에 놓였다.

정 위원장까지 직접 나타나 중국을 격하게 비난하는 퍼포먼스를 벌였으니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이 사건의 결과는 실제로도 엄청났다.

중국은 동북공정의 완전한 포기를 선언해야 했고, 고구려가 중국사라고 가르치던 중국아이들의 역사교과서도 다시 쓰였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 조작 현장까지도 원상으로 복구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허 원장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홀연히 사라져 버리자 북경과의 유일한 연결고리가 끊어진 상황이었다.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자 동북 3성 일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향유하던 왕 회장의 신세도 그야말로 알곡이 빠져버린 쭉정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쯤 되었으니 장백산천지회가 무사하리라 생각한 사람은 적어도 동북 3성 일대에서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죽으란 법은 없었다.

웬걸 허 원장의 뒷배를 봐주던 왕 서기가 직접 연락을 해와서는 제법 쏠쏠한 일거리를 맡겼다.

대고려연방령인 장백산의 동문일대에서 둥지를 튼 박철에게 자금이라던가 각종 물품을 지원하는 사업이었다.

이건 뭐 식은 죽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단순히 명의만 빌려주고도 중간에서 이것저것 뜯어먹을 수 있는 구전도 두둑하여 왕 회장으로서는 거의 횡재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반면에 북경의 왕 서기는 허구한 날 전화질을 해대는 왕 회장 때문에 심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방금도 이 작자의 청탁전화를 받았는데

‘지시하신 대로 잘 돌아가고 있으니까 우리만 탁 믿으시고 상무위원님은 아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 그리고 며칠 전에 부탁드린 거 그것도 좀 빨리 해결되었으면 합니다!’

뭐 이런 식이었다.

한낱 지방의 삼합회 두목 따위가 감히 공산당의 중앙 상무위원을 대하는 태도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위험이 따르는 일이다 보니 당국이 직접 나설 수도 없는 일이고 다소 골치는 아프더라도 천지회를 앞세워서 박철의 사업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가 예기치 않은 문제라도 발생한다면 이 단체에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면 될 일이다.

그런데 왕 회장이란 작자가 날이 갈수록 오만방자한 본색을 드러내고 있어 성질 같아서는 확 엎어버리고 싶었지만 이 중요한 시점에서 그럴 수도 없어 꾹 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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