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보고서 2
해가 바뀌기 전, 꼭 한번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은하의 간곡한 요청이 성사되었다.
특별히 성탄절 이브를 골라서 역전의 미니탐험대가 은하부부의 서울아파트를 찾았다.
남산이 올려다 보이는 작은 아파트였지만 이 집 안주인의 차분한 성격답게 전반적으로 집안 분위기가 편안해 보였다.
소박한 불빛으로 반짝이는 성탄절 츄리가 그다지 멀지 않은 남산타워의 조명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거실 한가운데를 떡하니 광대한 면적으로 차지하고 있던 큰 상 하나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들에 대한 이 집 안주인의 마음인 듯 차라리 잔뜩 힘을 주고서 버티는 상다리의 모습이 감동적이다.
자신들의 짝들과 함께 쌍쌍이 둘러앉은 손님들은 계속 나오는 음식들 앞에서 더 이상은 놓을 자리가 없다며 하소연하는 지경이 되었다.
경은과 진숙이 은하를 도우려 일어서려고 했지만 기어이 자리에 앉히며 은하가 하는 말이다.
“오늘은 그냥 많이 드시고 편히 쉬다가 가는 것이 날 도와주는 거니까 꼼짝들 말고 자리에 앉아 있기예요”
경은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윤 소장과 은하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이모님의 정성이 담긴 음식이니까 맛있게는 먹겠습니다만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너무 고생하셨어요!”
이때 넉살 좋은 규태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특유의 입담을 자랑했다.
“아이고 이모님! 우리가 어데 넘이던교?
이래까지 안 해도 되는데 진짜로 상다리가 뿌사질라고 하네요!”
경은이 규태의 볼통한 볼살을 두 손으로 당기면서 익살스럽게 말했다.
“넘이 아니니까 상다리가 뿌사지도록 준비하셨겠지!”
두 경상도 선남선녀의 입담에 모두는 폭소를 터트렸고 한참을 따라 웃던 진숙이 재촉하듯 은하에게 말했다.
“이모님! 이제는 정말로 더 놓을 자리도 없습매다,
여기로 와서 우리랑 같이 앉으시라요,
이모님이 여기에 앉으셔야 우리가 편히 음식을 들지 않갔습니까?”
진숙의 성화에 은하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윤 소장의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이때 규태가 너스레를 떨면서 포도주병의 마개를 땄다.
“내가 오늘 큰 맘 묵고 서울 백화점 와인코너를 다 가봤다 아입니까!
왔다야 이놈 빛깔 한번 보소? 끝내주지요!”
포도주병의 마개가 개봉되자 규태가 먼저 윤 소장 내외에게 잔을 채우려 했지만 윤 소장이 제지하면서 말했다.
“오늘은 여러분들을 위하여 우리 부부가 마련한 자리입니다,
귀한 손님들에게 먼저 잔을 따르는 것이 대접하는 사람의 도리인 것 같습니다”
규태로부터 건네받은 포도주병을 받아 들고서 일일이 손님들의 와인 잔에 채워주었다.
마지막으로 남게 된 주인부부의 잔은 은하의 옆자리에 앉은 진숙이 따르면서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고 보니 함께 백두산을 오르던 생각이 떠올라서 감개무량합니다.
이렇게 좋은 자리를 만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모님!”
진숙의 말에 장난기가 발동한 규태가 또 불쑥 끼어들었다.
“그 왜 백두산흑곰한테 쫓기던 생각은 안 나네?
그때 내가 육포 한 덩이를 던져주지 않았으면 우린아마 진즉에 잡아 먹혔을 거야! 그렇지 않네? 진숙동무!”
경은이 또다시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 오빠래 순 공갈쟁이 아닙니까?
곰이 아니라 백두산 멧돼지였어요!
정월 엄동설한에 동면에 들어간 곰들이 어디를 싸돌아다닌답디까? 공갈쟁이 동무!”
멋쩍은 표정으로 규태가 다시 대꾸했다.
“아참! 그때 우리를 구해준 중대장 동무가 백두산흑곰이었지, 동무들 내가 착각했수다!”
규태의 제안으로 모두가 잔을 들었다.
짠하고 모두의 잔이 부딪쳤고 왁자지껄한 만찬이 시작되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이 집 아파트의 거실은 특별한 사연을 지닌 이들이 성탄절 이브의 만찬을 즐기기에는 더없이 훌륭했다.
은하는 5년 전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장백산천지회의 지하창고에서 자신을 구해준 장면이 떠올랐을 땐 절로 눈물샘이 터지고 말았다.
급히 화장지 한 장을 꺼내든 은하가 한 명 한 명 고마운 은인들을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일 때 감수성 예민한 경은이 은하의 상념을 눈치챘다.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이고 보니까 이모님이 당시의 백두산 고행기가 떠오르셨나 봅니다, 그렇죠! 이모님?”
모두의 이목이 잠시 은하에게 주목되자 은하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고행기라면 고행기가 맞겠죠,
그런데 난 고생했던 기억보다는 여러분들을 만나서 오히려 행복했던 기억들이 더 많답니다,
호텔 지하창고에 갇혀 있었을 땐 분명히 악몽이었지만 극적으로 여러분들을 만나고부터는 오히려 행복한 시간들이었어요,
정말이에요! 여러분들 덕분에 다시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잖아요?”
저녁식사를 마친 후 번잡스럽게 광대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큰 상을 규태와 상윤이 번쩍 들어서 부엌으로 이동시켰다.
비워진 거실에는 아담한 다과상이 차려졌고 손님들의 와인 잔에는 이 집의 주인에 의해서 일일이 내용물이 보충되었다.
“다들 알겠지만 연방의 돌아가는 상황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어요,
이런 상황이 길어지면 좋지가 않아요!”
윤 소장이 잠시 뜸을 들이던 사이 규태가 불쑥 끼어들면서 부연설명을 자처했다.
“우리 내부적으로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어떤 한계 같은 것이 보인다고나 할까요?”
결과적으로 이 모두가 일본과 중국의 반격으로 빚어진 일이지 않습니까?
특단의 대책을 세워서라도 하루빨리 이 위기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연방정부의 내부사정을 잘 알고 있던 상윤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사실 연방정부는 과거 남북한의 정부에 비하면 너무나도 힘이 없습니다,
연방대통령님을 뵐 때마다 그분의 처진 어깨가 눈에 밟혀서 하루종일 우울하다는 연방공무원들이 많은 실정입니다”
다음 차례는 진숙이었다. 모두의 얼굴이 자연스레 진숙으로 모아졌지만 진숙은 한동안 남산타워의 불빛만 멍하니 바라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생뚱맞은 침묵이 어색했던지 진숙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문을 열었다.
“우리 위원장님은 일없어십니다!
제가 옆에서 지켜본 위원장님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으십니다,
주변에서 그렇게 흔들어대는데도 미동 하나 없이 굳건하십니다,
위원장님께서는 하루 종일 서제에만 계시지만 오직 연방의 안정을 위한 고민뿐이십니다,
하지만 위원장님도 인간이신데 어찌 힘들지 않으시겠습니까?
밤낮없이 인민들이 몰려와서 저토록 아우성들을 치고 있으니 무척 힘이 드시는 건 어쩔 수 없단 말입니다”
진숙이 또다시 남산타워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감정이 북받친 듯 눈자위가 붉어졌다.
“그런데도 잘 이겨내시고 계십니다,
문제는 여사님이십니다,
여사님께서 너무 힘들어하셔서 고것이 큰 걱정입니다”
진숙의 말문이 막히더니 급기야 눈에서 눈물까지 글썽이자 옆자리의 은하가 재빨리 화장지를 건네면서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모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진숙의 마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려줄 생각이었지만 한 사람만은 생각이 달랐다.
규태가 흥분을 자제하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 연방을 다시 갈라놓기 위해서 외세의 앞잡이들이 흔들어대는 것 아닙니까?
거기에 우리가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에 난 솔직히 엄청 화가 납니다!
이 암덩어리들을 우리 사회로부터 완전히 도려내야 하는데 마땅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답답할 지경입니다!”
상윤도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잔을 만지작거리다가 한 번에 털어 넘기는 객기까지 보인 후 말문을 열었다.
“그나마 남쪽사회는 이전부터 여당과 야당 시민단체 간의 갈등구조라는 것이 존재했기 때문에 이겨낼 면역세포가 충분하갔지만 북쪽에서는 이런 것들이 취약하단 말입니다,
전적으로 위원장님 한분에게만 모든 짐을 다 지우고 있으니 그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 가늠조차 안 된단 말입니다,
네 맞습니다! 길게 가면 좋지가 않지요,
조속히 해법을 찾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