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보고서 3
잔뜩 근심 어린 표정으로 윤 소장이 상윤과 진숙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래서 난 북조선재건회의가 가장 큰 문제라고 봐요,
이제는 그 세력들이 북쪽 다섯 개 주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어요,
정 위원장의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예요,
날이 갈수록 통일을 후회하는 인민들은 늘어날 테고 그들이 모두 정 위원장을 압박하고 나선다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진숙이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위원장님의 존함을 함부로 도용하고 있어 위원장님의 운신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가 계속된다면 위원장님께서 모종의 결단을 내리시지나 않을까 난 솔직히 두렵기까지 합니다!”
대화에 끼지 못하고 듣고만 있던 은하가 작심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딱딱한 시국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그만들 두시고요,
그나저나 사랑스러운 우리 두 쌍의 연인들은 언제나 좋은 소식을 들려주렵니까?
누가 먼저 말해볼래요? 어서요!”
은하의 재촉에 상윤과 진숙을 바라보던 경은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우린 뭐 아직 사랑이 덜 여물어서 그런지 앞으로도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지만 진숙언니 네는 더 기다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언니까지 떡하니 연방정부의 사무관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 타이밍에 규태가 또 농담 한마디를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다.
“한강이남 최고의 명문사립대를 나온 우리도 못해낸 일을 상윤 동무와 진숙동무래 정말 대단들 합니다!”
규태의 실없는 농담에 모두 밝은 표정으로 한바탕 웃게 되자 경은이 다시 끼어들었다.
“공갈쟁이 동무래 진숙언니한테 남쪽에서는 등록금이 비싼 순서대로 명문대학이라고 뻥을 쳤다면서요?
알고도 속아주니까 이젠 아주 뻥치는 재미까지 붙었습니까? 동무!
이 두 사람은 우리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김일성 종합대학 경제학부 출신들인데 어디다가 갔다 붙이는 겁니까? 넘볼걸 넘봐야지!”
진숙이 웃음을 그치고 살짝 부끄러운 표정으로 상윤을 바라보더니 이내 당찬 표정으로 전환했다.
“사실은 상윤 동무랑 다짐을 했더랬습니다,
연방이 안정을 되찾으면 그때 가서 아주 편한 마음으로 결혼식을 올리자고요”
진숙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려는 듯 상윤이 진숙의 오른손을 꽉 움켜쥐었다.
“곧 안정되지 안 갔습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신다면 곧 좋은 소식을 들려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35년의 새해가 시작되자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대담한 방식으로 토착 친일세력들의 대고려연방 흔들기가 시작됐다.
심혈을 기울였던 조상 땅 찾기 운동이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 실패하고 말았지만 북쪽 사람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앙금의 생채기를 남겼던 것은 큰 소득이었다.
거의 빛의 속도로 연방의회가 선제적인 입법조치를 단행했고, 정 위원장까지 직접 나서 정면으로 맞대응하여 그나마 이 정도에서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이지 연방은 또다시 절단이 나고도 남음이 있었다.
쉼 없이 솟구치는 분수 물처럼 다케시마 수복결사대가 지원해 주는 자금들이 넉넉하게 쌓여갈수록 돈냄새를 맡은 토착 왜인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었다.
자신감을 얻은 신일진회는 이번 참에 아예 끝내기 승부수를 두기로 했다.
그동안의 아지트였던 광화문광장을 벗어나서 적진의 심장부인 평양 진격을 결정하게 된다.
다가오는 3월 1일을 ‘평양 대진격의 날’로 정하고 연초부터 대대적인 홍보에 들어갔다.
3월 1일 오전 11시 놀랍게도 장소는 구 북한의 주석궁으로 알려진 금수산 태양궁전 앞 중앙광장이었다.
금수산 태양궁전이 어떤 곳이던가!
여기는 정 위원장의 할아버지가 생전에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했던 곳이다.
현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북쪽 다섯 개 주를 통틀어서 가장 엄숙한 공간이다.
신일진회가 하필이면 이곳을 콕 찍어서 결전의 장소로 선택했던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조치였음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었다.
이참에 아주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결기를 보여주는 막가파식 작전이었다.
그런데 대고려연방을 확실하게 뒤집어 놓기 위해서는 연방의 분열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지닌 또 다른 단체의 도움이 절실했다.
신일진회와 북조선재건회의, 남과 북을 대표하는 두 분열세력은 각자의 목표를 위하여 서로 상대의 존재가 필요함을 잘 알고 있었다.
판때기를 먼저 깔아놓은 신일진회가 저들의 전략적 제휴 상대를 향해서 어서 오라고 손짓했을 때 잔머리의 귀재인 박철이 이 손짓에 곧바로 응답했다.
박철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북쪽 다섯 개 주에 퍼져있던 북조선재건회의 조직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다가올 결전에 대비했다.
2월 중순, 정 위원장이 다른 북측 위원들과 함께 국정자문위원회 정기회의에 참석차 연방정부청사에 들어섰다.
내외신 기자들의 빗발치는 질문 속에서도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꽉 다문 채 뚜벅뚜벅 걸어갔다.
“위원장님께서 북조선재건회의를 묵인하신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3월 1일 주석궁 앞에서 대규모의 시위가 예정돼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집회에 위원장님도 참석하십니까?”
“남과 북으로 다시 갈라선다는 소문이 사실입니까?”
“통일을 후회하십니까?”
이 마지막 질문이 정 위원장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뒤를 돌아보더니 질문을 던진 연합통신사의 젊은 기자를 또렷이 응시했다.
“조국이 통일되고서 나 자신 민주주의 방식에 적응해 보려고 무진장 애쓰고는 있습니다만 참으로 어려울 때가 있어요,
물론 어쩔 수 없이 감내는 해야 갔지만 말입니다,
바퀴벌레 몇 마리가 나댄다고 새 집에 이사한 걸 후회하느냐고요?
차라리 새 집을 보호하기 위해서 바퀴벌레를 모조리 밟아버리겠습니다,
대답이 되었습니까? 기자양반!”
이 말을 남긴 채 정 위원장이 가던 길을 재촉하자 정 위원장의 기세에 눌려 새파랗게 질려버린 젊은 기자가 그제야 안도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회의에 임해서도 정 위원장은 시종일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고 의례적인 인사말 외에는 거의 발언하지 않았다.
기자에게 했던 말속에서 정 위원장의 심경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대체 민주주의가 무엇 이관데 감히 주석궁 앞에서 ‘평양대진격의 날’이라고 명명된 반체제 행사가 버젓이 열릴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시신이 보존되어 있는 금수산태양궁전 바로 앞이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공화국의 드높았던 위엄들이 땅바닥에 패대기치듯이 모독받을게 뻔히 예상됨에도 말이다.
정 위원장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집회허가를 취소시키고 불순분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서 중죄로 다스려야 했다.
그런데도 연방정부는 단지 집회허가의 요건이 충족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합법적인 집회로 인정해 주었다.
정 위원장으로서는 연방정부의 이런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사실 연방정부와 평양시 당국에서는 사회혼란이 우려된다며 처음부터 일관되게 집회허가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신일진회가 연방행정법원에 제기한 ‘집회금지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의 일부를 인용하는 판결을 내림에 따라 연방정부로서도 집회의 허가를 내어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국정자문위원회 회의참석에 앞서 정 위원장이 했던 이 문제의 발언을 영악한 박철이 가만 놔둘 리 없었다.
북조선재건회의의 선전선동 문구에 재빨리 삽입되어서 정 위원장의 본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헷갈리게 만드는 자료로 활용되었다.
사태가 엉뚱한 곳에서 크게 확산되어 나가자 진숙은 규태에 이어서 상윤의 전화까지 받아야 했다.
“내가 그렇게도 말하지 않았네?
위원장님의 진심은 일관되게 대고려연방의 안정을 바라시는 마음뿐이시라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단지 수령님과 장군님께서 잠들어계시는 주석궁 앞에서 집회허가가 난 것에 대해서는 이해를 못 하고 계시지만,
최근 들어서 위원장님 내외분은 거의 식사도 못하고 계셔!
여사님은 불안 증세까지 생기셨는지 안절부절못하고 계시고, 심지어는 조용한 데로 이민 가서 살자는 말씀까지 하셨단 말이야,
얼마나 괴로우시면 그런 말씀까지 하셨갔네!
방금 내가 한 말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꼭 너만 알고 있어라,
걱정이 돼서 참말로 내가 다 죽을 지경이야”
그러나 진숙의 간곡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상윤은 연방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숙이 자신에게만 내밀하게 말했던 이 문제의 발언은 조심스럽게 윤 소장에게로 전달되었고 윤 소장은 주저하지 않고 삼일특공대의 긴급 과제로 상정했다.
과제의 제목은 ‘반통일 세력의 척결을 위한 대응책 강구’로 정해졌다.
통상적으로 긴급과제가 부여되면 팀원들의 기존 업무는 일체 중단되고 보고서가 완료될 때까지 외근은 물론이고 심지어 퇴근조차 금지되었다.
간간히 자신들의 업무 책상에서 쪽잠들을 자면서 하루 세 차례씩 진행하는 살인적인 고강도의 기획회의 자료를 축척해 나갔다.
기획회의는 아침 점심 저녁 식사 전에 한 시간 내외로 진행되었고 돌아가면서 자신들이 작성한 초안을 발표하고 함께 토론을 이어나갔다.
자신의 기획안보다도 타당한 기획안이 나오면 그 초안에다 자신의 주장을 가미하여 새로운 기획안을 만들어나가는 대단히 효율적인 작업방식이었다.
기획회의를 거듭하면서 기획안의 내용물이 예리하게 가다듬어져 통일광장에 우뚝 선 광개토대왕의 칼날처럼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