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들판이 모내기를 하느라 분주한 계절이다.
해마다 벼농사를 지어보면 우리네 인생과도 참으로 많이 닮아있음을 알 수 있다.
저온창고에 넣어두었던 작년에 수확한 볍씨를 해갈하여 싹을 틔우는 과정이 벼농사의 첫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싹을 틔운 볍씨를 모판의 고운 상토 위에 가지런히 깔아서 어린 모판을 만들고 차광막이 둘러쳐진 하우스 속에서 정성으로 키워낸다.
어린 모가 잘 자라도록 부드럽게 채썰이를 한 논에 모내기 하루 전날 어린 모판을 던져두면 다음날 모내기를 한다는 신호다.
이른 새벽같이 논두렁 위로 건져 올린 어린 모판을 아침부터 이양기를 이용하여 누런 황금들판을 꿈꾸면서 드디어 모내기가 시작된다.
모내기를 하고 나면 연약하기 짝이 없는 어린 모가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을 갖추는 열흘가량이 가장 중요한 기간이다.
모내기를 마쳤다고 하여 어린 모를 방치하였다가는 며칠못가서 말라서 죽거나 물에 잠겨서 녹아내리는 것은 다반사기 때문에 갓난아이를 키우듯이 적잖이 마음이 쓰인다.
논에 물을 대더라도 어린 모가 떠내려가지 않을 정도로 땅속으로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잎줄기가 물에 잠기지 않을 만큼 충분히 활착이 될 때까지는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며칠간격으로 부지런히 논에 물을 대어주고 땅의 구베가 맞지 않아서 덤성덤성 어린 모가 녹아내린 휑한 곳에는 그때마다 손수 어린 모를 메워주어야 농민의 마음도 편하고 남들 보기에도 민망하지 않은 법이다.
어린 모의 상태가 웬만큼 생기를 회복하였다면 때를 놓치지 않고 중기제초제를 살포하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한다.
무지막지하게 번식하는 잡초로부터 어린 모를 보호하려면 잡초의 생육환경을 초장부터 철벽방어할 필요가 있다.
또 미꾸라지의 사촌 격인 무법자 드렁허리가 뚫어놓은 논두렁을 제때 손보지 않는다면 논물관리에 큰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여름 내내 물관리와 잡초제거 병충해방제에 온 신경을 쓰다 보면 가을에는 누렇게 잘 익은 황금들판을 바라보면서 뿌듯한 마음으로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받는다.
우리네의 인생살이도 이와 유사한 사이클을 가지고 있다.
어린 모와 같이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한 아동기를 지나서 씩씩하게 폭풍성장하여 가지를 치는 청년기를 거치면 황금들판과 같은 넉넉한 장년기가 도래한다.
연약한 어린 모를 보호하고 성장시켜서 누렇게 무르익은 곡식이 출렁일 때가 들판의 황금기라고 한다면 우리네 인생의 황금기는 언제일까?
통상적으로 혼주가 될 시기가 임박할수록 품앗이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법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결혼식장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골똘히 살펴보면 곧 혼주로서의 엇비슷한 처지가 도래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전까지는 다소 느슨한 마음으로 지인들의 결혼식장에서 얼굴도장이나 찍는 식이었다면 우리 아이들에게도 뭔가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눈빛이 달라진다.
의무감이 아니라 결혼식자체를 본격적으로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오래된 전통인 품앗이 경제학이 있다.
한 가정을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자녀의 결혼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막대하다고 할 수 있다.
요사이는 그래도 많이 개선된 편이라지만 입에 풀칠하기에도 바쁘던 과거에는 집안의 기둥뿌리가 흔들릴 만큼 큰 부담이 되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일가친지와 동네사람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알고 지내던 모든 지인들까지 총출동하여 서로 협력하는 품앗이 문화가 오늘날까지도 전승되고 있다.
요즘은 정말이지 매주 한두 차례 씩 누구 집 마실 다니듯이 결혼식장을 번지르하게 들락거리는 것 같다.
결혼식장에서 자주 만나는 지인들이 바로 그 품앗이 경제학의 주요 멤버들인데 지금껏 살아온 인간관계의 실상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내가 살아가는 곳은 농촌은 농촌인데 온전한 농촌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반농 반도시 같은 좀 특별한 곳으로써 핵심은 교통이 끝내준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그야말로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니던 오리지널 농촌지역이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도심지가 확장하면서 오늘날에는 빠른 속도로 개발의 기운이 뻗치는 사통팔달의 교통편리성으로 인하여 굳이 떠날 이유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결혼식장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들은 온통 우리 동네를 근거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친구들의 면면을 살펴봐도 중고등학교 대학교도 아닌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태반이라면 살아가는 생활환경이 시골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엮여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환갑의 나이를 먹도록 시골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농사도 짓고 사업도 하고 도심지의 회사로 출퇴근하면서 우리 친구들은 그렇게들 잘 살아가고 있다.
대부분의 남녀동창생들이 기껏 한 시간 내외면 달려올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서 살고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우리 친구들의 특장점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얼마 전에는 단체로 환갑여행을 다녀 올 정도로 이 나이를 먹도록 너나 할 것 없이 시골초등학교의 고추친구들이 가장 중요한 친구목록에 올라있는 실정이다.
그 덕분에 아직도 시골초등학교의 주변을 맴도는 어린 동심의 정신세계에 갇혀있는 느낌인데 축복받은 고향에서 살아가는 일종의 보너스라고나 할까?
뭐 남자아이들이야 오랜 세월 그러니까 무려 이십 대 초반부터 계모임을 함께 하는 처지니 그렇다 치더라도 여자아이들도 집안의 경조사 때는 물론이고 매년 한두 차례의 동창회 행사 때는 어김없이 얼굴들을 보는 절친사이다.
그야말로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품앗이 경제학의 중요 멤버라고 말할 수 있어 결혼식을 마치고 뷔페식당으로 이동하면 자연스럽게 시골초등학교의 번개 모임이 개최된다.
최근에는 결혼식장에 부속된 뷔페식당의 수준들이 한꺼번에 급상승하여 우리 또래의 늙은 아이들이 십만 원의 축의금을 내고 모여서 놀기에는 한마디로 가성비가 짱이다.
느긋하게 밥도 먹고 커피까지 마시면서 온갖 수다를 떨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솔직히 말해서 어떨 때는 은근히 결혼식이 기다려지기까지 하는 실정이다.
하마터면 대단히 난처한 상황이 연출될 뻔하였던 이날만 하더라도 뷔페식당의 두 테이블을 차지한 남자아이들이 먼저 오찬을 즐기고 있었다.
성미 급한 남자아이들은 진득하게 결혼식의 전 과정을 구경하면서 식당으로 내려올 만큼의 인내심이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 여자아이들의 테이블까지 함께 찜한 후 뷔페 한 접시를 먼저 비우고 있을 무렵 감동적인 혼주 덕담이었다면서 화사한 표정으로 여자아이들이 떼로 몰려온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남자아이들이 잡아놓은 옆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서는 본격적인 남녀아이들의 동창회에 앞서 우선 빈접시를 채우러 나간다.
그런데 문제는 결혼식의 뷔페식당에는 이 장면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무려 오십 년 전에 한 교실에서 공부한 남녀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절친의 아들딸이 결혼을 한다는데 당연히 찾아와서 축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장면이다.
그런데 남자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오래된 여친들 말고도 챙겨야 될 또 다른 가족이 있다.
삼십 년 이상을 남편친구들의 계모임에 준회원의 자격으로 참여하는 와이프들로서도 당연히 남편과 동행하여 결혼식장을 찾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장면이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성장하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았기 때문에 장성한 아이들의 결혼식에 참여하는 그 마음이 오히려 더욱 애틋할 수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결혼식을 마치고 뷔페식당으로 이동하였을 때 자리배치를 어떻게 할 것이냐가 고민거리로 등장한다.
필연적으로 아래의 세 가지 가운데 하나가 될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첫째, 함께 온 와이프들 눈치나 본답시고 오랜만에 만난 여자아이들과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서먹서먹한 상황 속에서 서로 멀찍이 떨어진 테이블에서 각자 따로 식사하는 모습이다.
아마도 이런 모습이 연출된다면 어색하고 불편한 마음 때문에 여자아이들의 참석율이 갈수록 떨어지지 않을까 우려되는 상황이 만들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리고 보수적인 시골남자아이들의 체통에도 적지 않은 생채기가 생길 것 같아 고개가 가로저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둘째, 그냥 편하게 남자아이들을 중심으로 왼쪽은 여자아이들이 자리를 잡고, 오른쪽은 와이프들이 자리를 잡아서 서로 웃고 떠들면서 편하게 식사를 하는 상황이다.
아직은 이런 경험이 없었어 잘은 모르겠지만 십중팔구는 남자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왼쪽 오른쪽을 신경 쓰느라 뷔페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몰라서 대부분이 앓고 있는 역류성식도염으로 고생깨나 할 것 같다.
대단히 민망하고 난처한 상황이라 그다지 유쾌한 식사자리는 아닐 것 같다.
셋째, 현명한 와이프들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리를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잡고 앉아서 자신들끼리 오손도손 식사를 즐기며 오래된 초딩친구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통창회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상황이다.
암만생각해 봐도 선택지는 정해진 것 같은데 두 번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피씩 웃음이 튀어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적어도 머리숱이 휑하여 덤성덤성 볼품없는 남자아이들의 시근 머리가 첫 번째의 모습은 아니어서 퍽이나 다행스럽다.
사전에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은 없지만 이런 곤란한 상황들을 남자아이들만 생각하였을 리는 없을 테고 함께 온 와이프들이 자진하여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기들끼리 식사하는 문화가 자연스레 만들어졌던 것 같다.
그런데 정말로 쓸데없는 오지랖이 발동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동안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던 평화로움을 방해하는 열지 말아야 할 금기의 항아리를 열어젖히려는 순간이었다.
뷔페에서 얼추 식사를 마치고 원두 한잔의 여유를 즐기던 타이밍에 여자아이들의 총무를 맡고 있던 '봉이'가 대뜸 옆 테이블의 남자아이들에게 말했다.
"야! 너거들 와이프 하고 같이 왔으면 언니들한테 인사 한번 시켜봐라? 어차피 경조사 때는 얼굴을 보면서도 여태 제대로 된 인사도 못했잖아!"
난데없이 불쑥 튀어나온 이 말에 남자아이들의 표정이 점차 굳어지는가 싶었는데 마침 봉이 바로 옆자리에 서있던 허 부장이 아무 생각 없이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분명 와이프를 호출하는 목소리가 포착되었고 이때 눈치 빠른 친구 녀석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고만 됐다! 족보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그냥 대충 넘어가자!"
이 말에 잔뜩 긴장된 표정의 남자아이들이 허 부장을 째려보게 되면서 그제야 허 부장도 알아들었다는 눈치로 다시 와이프에게 안 와도 된다며 정정하는 머쓱한 촌극이 벌어졌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남자아이들로서는 지금까지의 평화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불필요한 변화를 온몸으로 거부하는 일치단결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생각해 보면 봉이의 문제제기는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제기였다.
매번 경조사 때마다 얼굴을 보면서도 서로가 맨숭맨숭 멀찍이 떨어져서 식사하는 이 불편한 모습을 더는 참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초딩의 순수한 마음으로 이참에 서로 인사나 하면서 잘 지내보자고 제안하였지만 환갑의 나이에 이른 남자아이들의 생각은 봉이의 생각이상으로 심오한 수학방정식을 풀고 있었던 거다.
졸업한 지 반백년이 다되어가지만 어쨌든 여친은 여친인데 와이프들과 서로 언니 동생하면서 말문이라도 터버린다면 중간에 놓인 남자아이들의 처지가 대단히 곤궁해질 수 있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적당한 정도의 거리감으로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생동감 넘치는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 근거는 없지만 막연히 그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심전심이랄까? 현명한 와이프들도 일부러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자기들끼리 희희낙락거리며 즐거워할 뿐 굳이 나이 많은 초딩 아이들의 동창회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작년 연말의 송년회 이후 오랜만에 얼굴을 내민 진 사장이 생업전선에 나선 바쁜 와이프 대신 딸과 함께 참석하여 식사를 하면서 서로 정답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내년 가을즈음 딸아이의 결혼식을 앞두고 친구들에게 겸사겸사 인사도 시킬 겸 동행하였던 모양이다.
이 모습에 잔뜩 부러운 표정의 허 부장이 한마디를 거들고 나섰다.
"부녀지간에 소통이 잘 되는 것을 보니 참으로 보기가 좋소!"
그렇잖아도 허 부장의 가부장적인 스타일을 잘 아는 진 사장이 빙긋이 미소 지으며 말한다.
"와? 너거 딸 하고는 대화가 잘 안 되나!"
진 사장의 대꾸에 허 부장도 이제는 달관했다는 듯이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우리 딸 하고는 다정다감하게 대화를 해 본 적이 언젠지 이제는 기억도 안 난다"
그동안 건강도 좋지 않고 하여 참석율이 저조하였지만 앞으로는 자주 얼굴을 보이겠다며 친구들에게 말하는 진 사장의 모습에서 그 옛날 전교어린이회장 선거 때 운동장에서 말린 빼때기를 하나씩 나누어주던 오래된 사진 한 장이 오버랩되었다.
인생을 통틀어서 '혼주'가 될 수 있다는 특별한 의미는 황금들판의 누런 곡식들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볼 수 있는 인생의 결실기라고 말할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이런 시간조차도 인생에서 특별한 시간이라는 사실이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한때의 시간일 뿐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않는다.
한창 자녀들을 출가시키느라 분주한 지금이 우리들의 인생에서 가장 황금기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친구들아! 우리 서로 건강하게 오래오래 보고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