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껏 환갑의 나이를 먹도록 살아오면서 정말이지 이런 기분은 난생처음이었다.
친가와 외가를 망라한 많은 일가친지들과 친구들 선후배들 동네사람들 아들내외의 지인들 그리고 오늘 처음 보는 사돈댁의 하객들까지 꽤 많은 인원들이 잔뜩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단상 위의 오직 한 사람을 주시했다.
"과거 우리가 신랑신부의 자리에 섰던 시절에는 엇비슷한 레퍼토리의 축사를 꾸벅꾸벅 졸면서 듣던 기억이 납니다만 오늘은 시간을 재셔도 좋습니다, 요사이의 변화된 결혼식 트렌드에 맞추어서 딱 삼분 삼십 초 안에 마무리하겠습니다"
어쨌든 스피드 하게 끝내겠다는 말 때문이었던지 모두는 가벼운 웃음으로 안도하면서 다음 말에 귀 기울였다.
그 표정들이 신기하리만치 나의 머릿속을 차분하고도 명료하게 만들었다.
준비한 대본을 꺼내서 탁상 위에 펼치라는 결혼식 도우미의 재촉으로 준비한 A4용지 한 장을 양복 안주머니에서 꺼내기는 했지만 이깟 종이는 보지도 않겠다는 듯이 접힌 상태 그대로 올려놓는 만용을 부리자 도우미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듯 시건방진 만용을 부릴 때는 믿는 굿석이 있었기 때문인데 머릿속에서는 영화의 자막처럼 혼주 덕담의 문구들이 착착 돌아가기 시작하고 그 위에는 초시계까지 째깍째깍 움직이면서 목표했던 시각의 어느 지점을 지나고 있음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하객들을 두루두루 섭렵한 후 다시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던 신랑과 신부의 얼굴을 주시했다.
사실은 채 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실제로 혼주덕담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처음부터 아들내외는 지속적으로 나에게 요청하고 있었지만 난 손사래를 치면서 사양하던 중이었다.
굳이 그 이유를 말해보라면 요사이의 재미난 결혼식 트렌드에 찬물 한 바가지를 끼얹지 않을 자신이 없었던 거였다.
친구가족들이 모여서 노래방에라도 간다면 신나는 여흥의 중간에 꼭 '사노라면'같은 노래를 불러서 산통을 다 깨고 마는 분위기 파괴 흉악범이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최근의 결혼식은 지난 시절 우리 때와는 달리 마치 재미난 문화행사에라도 왔다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참신하면서도 생기발랄한 프로그램으로 꽉 채워져 있다.
어떻게 보면 지루하고 따분한 분위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추세여서 과거의 지루한 문화와는 딱 잘라서 단절하려는 살벌한 분위기까지 느껴질 정도다.
지루한 결혼식의 주역으로 지목된 주례사는 진즉에 폐지된 지 오래고 고루하기 짝이 없는 폐백의식도 언제부턴가 은근슬쩍 잘려나가는 마당이었으니 자칫 혼주 덕담 한번 잘못했다가 두고두고 낭패를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혼주 덕담마저 없다면 프로그램의 내용이 너무 빈약할 것 같다면서 한번 도와달라는 아들내외의 간곡한 하소연에 결국 결혼식을 딱 일주일 남겨둔 시점에서야 마지못해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소식은 곧바로 우려의 목소리로 다가왔다.
'헐 우리 아빠가 혼주덕담을 하게 된다면 하객들이 엄청 지루하게 생각할걸'
'웬만하면 사돈댁에 부탁하지 그래요, 당신은 절대로 하면 안 돼요! 분위기 망쳐요!'
그렇잖아도 생김새부터가 무뚝뚝하고 지루한 스타일인지라 화품이나 쩍쩍하게 만들면 어쩌나 하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보편타당한 걱정타령이 이어졌다.
저토록 딸아이와 애들 엄마까지 만류하고 나선 분위기라 도통 입맛도 없고 하던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기왕지사 벌어진 일이라면 걱정만 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닐 터, 일단 부딪혀보기로 했고 작전명은 '지루하지 않은 혼주 덕담'으로 정했다.
작전에 돌입하면서 중요한 원칙 두 가지를 정하기로 했는데 하나는 남이 쓴 문장을 참고하지 않는다는 것과 두 번째는 하객인사를 포함하여 최대 삼분 삼십 초 안에 끝낸다는 원칙이었다.
사실 이 원칙은 지인들의 결혼식을 두루 다니면서 혼주덕담의 내용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느낀 나름의 소회를 바탕으로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그러고 보면 마음속으로는 혹시 있을 수 있는 이런 날을 대비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매번 들어본 같은 내용을 반복하여 듣게 된다면 대체적으로 지루한 생각이 들게 되지만 색다른 내용이라면 표정부터가 달라지는 법이다.
그렇다! 작전에 성공하려면 그렇고 그런 엇비슷한 레퍼토리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다소 어설프더라도 진정성 있는 내용물을 창작하자는 생각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다양한 연령층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말하면서도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면 남의 프린트물이 아닌 오롯이 나의 창작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잘 정리된 혼주덕담의 프린트물보다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제대로 된 100% 나의 생각을 전달하는 자연스러움으로 승부하기로 작정했다.
지루하면 모든 것이 꽝이 되어버리는 상황에서는 가급적 고리타분한 꼰대냄새가 나지 않게 주안점을 맞추면서도 행사의 성격에 맞게끔 덕담의 의미가 잘 전달되는 문맥의 포인트가 필요했다.
예식의 전체 시간을 고려할 때 딱 삼분 안에 마무리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테지만 암만생각해 봐도 하객인사까지를 고려한다면 다소 빠듯하여 부득이 삼십 초를 추가하게 되었다.
문장을 만들고 가다듬는 작업에 몰두한 지 삼일째가 되던 날의 아침이었다.
제법 늘늘한 글씨배열로 A4용지 한 면에 담긴 완성된 문장을 딱 한번 정독하여 읽어보고는 반듯하게 네 겹으로 접은 후 당일날 입을 새양복의 안주머니에 집어넣어 버렸다.
그리고는 식장에 들어갈 때까지 단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고 실제로 그날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프린트물을 읽어본 적이 없다.
이것은 일종의 마인드컨트롤 같은 개념으로서 그까짓 프린물 따위에게 종속되지 않겠다는 오롯이 창작자로서의 똥고집 같은 것이었다.
비록 순수한 나의 창작물일지라도 왠지 프린트물을 읽어 내려가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억양이며 표정이 부자연스러워서 따분하고 지루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퇴임사를 원고를 보지 않고서도 자연스럽게 말하다가 비서실장이 대신 써준 부분에서 한동안 멀뚱멀뚱하던 헌법재판소장의 모습을 떠올리며 피씩 미소 지으며 나 자신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이후 머릿속에서는 완성된 문장은 온데간데없고 온통 초안으로 잡아두었던 단문장들이 뒤죽박죽이 되어서 제멋대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무려 이틀 동안 한 번도 정리된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양복 안주머니 속의 프린트물을 펼쳐보지 않는 오기를 부렸던 것은 순전히 창작자로서의 똥고집과 불굴의 자존심 때문이었지만 그다지 가성비 좋은 전략은 아니었다.
심지어는 잠을 자기 전에도, 새벽에 눈을 뜬 뒤에도 하루 종일 그 생각뿐이었지만 우리 식구들조차도 대체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를 정도로 튀니지 않게 작전은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결혼식 바로 전날의 새벽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이불속에서 처음으로 완성된 문장이 암송되기 시작하더니 저녁에 이불자리에 들어서는 제법 속도까지 나기 시작하자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그렇지 내가 할 수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다음에 발생했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집안의 대사를 앞두고 그렇잖아도 마음이 싱숭생숭하던 참에 잠자는 타이밍을 놓쳐버렸고 밤새 멀뚱멀뚱 뜬눈으로 지새우고 말았다.
물론 그 덕분에 평소보다도 이른 새벽에 일어나 집 앞의 텃밭을 거닐면서 상추들과 부추들과 화단의 온갖 꽃들과 잡풀들을 대상으로 제대로 된 리허슬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있었지만 말이다.
열두 시에 예정된 결혼식이었지만 혼주 메이컵을 한답시고 아침 여덟 시까지 식장에 도착하여 양가 어머니들 메이컵 때문에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그만 진을 다 빼고 말았다.
겨우 메이컵을 마치고 열한 시경 식장 앞으로 내려와서는 일찍 들이닥친 하객들과 한참 인사를 나누던 중 또 느닷없이 사진을 찍는다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몰려든 하객들의 아우성으로 잰걸음으로 다시 달려와서는 정신없이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심신이 거의 파김치가 되어버렸다.
본격적으로 식이 시작되고 사회자의 주문에 따라서 잠시 숨을 고른 후 드디어 단상에 올라섰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머릿속은 온통 복잡하면서 아무 생각도 없는 백치처럼 하얬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은데 한마디로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무대 위로 조명등이 밝아지면서 웬일인지 내 머리도 산뜻하게 맑아지면서 명쾌해졌다.
신부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을 때 차츰 하객들의 얼굴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어쨌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신랑과 신부가 아닌 단상 위의 바로 내가 주인공이었다.
어젯밤 단 한숨도 잠 잘 수없었지만 그래도 와이프가 준비한 우황청심원도 먹지 않는 객기를 부리면서 제법 의젓한 자세로 신랑과 신부를 주시할 수 있었다.
머릿속의 명쾌한 집중력 덕분에 나의 표정은 밝았고 자신감에 넘쳤다.
여전히 씩씩한 표정의 아들과는 달리 잔뜩 긴장한 듯 홍조 띤 얼굴에 눈자위까지 파르르 떨고 있는 신부의 큰 눈망울을 바라보며 더욱 힘 있게 목청을 드높였다.
"이토록 밝고 똑 부러지게 야무진 어여쁜 여인을 우리 집안의 새로운 가족으로 맞이하게 되어 마치 큰 행운이 덩굴째 굴러들어 온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다시 한번 사돈댁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제야 신부는 다소간 긴장이 풀렸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난 계속하여 신부를 안심시키려는 표정으로 머릿속의 문구들을 차근차근 토해냈고 마지막 결론부에 다다랐다.
"오늘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두 사람의 가정이 희망찬 미래를 향하여 뚜벅뚜벅 전진할 수 있도록 힘찬 응원의 박수부탁드립니다!"
드디어 머릿속의 초시계가 단 1초의 오차도 없이 삼 분 삼십 초가 다되었음을 알리는 순간 신부가 돌아서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부지 최고!'
혼주석으로 되돌아왔을 때 옆자리에 앉은 와이프는 그럭저럭 만족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스피드 하게 잘 마쳤어요'
준비된 행사를 모두 마치고 뷔페식당을 돌아다니며 하객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나누던 중 짧지만 포인트가 있는 혼주덕담에 대하여 칭찬하는 여러 말들을 듣게 되었을 때 쓰윽하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렇게 하여 오늘의 지루하지 않은 혼주덕담 작전은 그럭저럭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하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저녁 무렵 딸아이가 자신은 축의금을 받느라고 못 봤다면서 미심쩍은 표정으로 아빠의 덕담이 어땠느냐고 물었을 때 가족들의 답변을 들을 새도 없이 난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요다음번에는 딸아이까지 혼주덕담을 부탁하게 된다면 이거 완전히 전문 주례사 아니 전문 덕담사로 나서야 되는 것은 아닌지 피씩 웃음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