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의 생일을 환갑이라며 다소 의미 있는 마음으로 맞이한 사람으로서 30% 남짓의 잔여 여생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길어야 이십여 년이 합리적인 추론이겠지만 지나간 시간에 비하여 '고작'이라는 말을 붙여야 할 정도로 짧은 시간임은 부정할 수 없다.
세상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임종의 순간, 나의 표정에서 지나간 시간들이 후회스럽지 않으려면 이 짧은 여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물론 건강과 경제적인 여건이 받쳐진다는 전제가 붙어야겠지만 그것은 불문에 부치기로 하고,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실컷 해외여행이나 다니면서, 하고 싶은 것들을 원 없이 하며 살아가는 것이 정답일까?
그런데 아쉽게도 난 장거리비행을 싫어하는 편이라 웬만해서는 해외로 나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라도 봄에는 동유럽, 가을에는 서유럽 식으로, 꾸역꾸역 연례행사처럼 세계여행을 신물이 나도록 다녀야만 임종의 순간 후회스럽지 않을까?
젊은 시절, 골프에 취미 붙일 기회가 없어 여태껏 골프와는 인연이 없었는데 이제라도 부지런히 골프를 배우는 것은 또 어떨까?
그래서 수억 원씩 하는 값비싼 골프회원권을 구입하고 매일같이 아침저녁으로 라운딩 하는 것을 취미로 삼는다면?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먹고 입고 사면서, 뭐든지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다면 과연 임종의 순간 흐뭇한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보다는 좀 더 심사숙고가 필요할 것 같으니 나중에 다시 거론하기로 하자.
그건 그렇고 죽음의 순간 도대체 나는 어디로 사라진다는 말인가?
불현듯 백 년 후의 내가 궁금해졌다.
제아무리 백세시대라지만 61세+100년=161세의 노인은 상상할 수가 없으니 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면? 혹시 육신을 벗어난 영혼들끼리 서로 죽지도 않고 영원히 살아간다는 딴 세상 사람이 되어있을까?
곰곰이 죽음의 과정을 되새겨 보면, 우리 몸의 심장이 먼저 작동을 멈추고 이어서 뇌혈류의 순환이 정지되면서 뇌사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심정지가 아니라 뇌사 상태가 되어서야 진정한 죽음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육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육신의 죽음과 동시에 마음마저 함께 죽는다는 것이 어쩐지 감정적으로는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오히려 뇌가 완전히 작동을 멈추었을 때 우리 몸에서 분리된 영혼이 공중에서 자신의 육신을 내려다보는 장면이 훨씬 자연스럽게 상상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혼령이 자신의 육체를 내려다보는 이런 장면은 필연적으로 영혼이 육체에 종속되지 않는 독립된 존재임을 전제로 하지만 현대 과학에서는 결단코 용인될 수 없는 허구의 장면이 분명하다.
명색이 물리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으로서 현대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동화 같은 딴 세상 이야기를 길게 운운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정서적으로는 이 같은 동화이야기가 훨씬 더 편안하게 다가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의 마음이 위치한 곳은 하트 같은 심장이 아니라 쭈글쭈글한 머릿속의 뇌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과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마음이란 것도 사실은 뇌라는 육신의 기능 현상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치매환자들의 MRI사진을 살펴보면 뇌세포가 줄어들어 심하게 위축되어 있듯이,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뇌세포의 노화와 함께 자연히 우리의 정신도 깜빡깜빡해지는 현상을 봐도 그렇고, 항우울제의 치료원리를 생각해 봐도 그렇다.
현대과학의 설명처럼 '나=육신'이라면 육신의 죽음으로써 당연히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겠지만 왠지 마음까지도 함께 죽는다는 사실은 쉬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과학을 떠나서 적어도 정서적으로는 확실히 그렇다.
그렇다면 백 년 후의 나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인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원자들은 138억 년 전 빅뱅으로 시작되어 별의 탄생과 폭발 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후 이합집산을 거듭하다가 그 일부가 다시 나의 몸을 구성하였고, 내 몸의 죽음으로 원자들은 다시 자연 속으로 흩어져 이합집산을 거듭할 것이다.
다만 흩어질 뿐 내 몸을 구성했던 원자들 중 단 한 톨도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우주 공간 속에서 다시 뭉치고 흩어지는 이합집산을 이어간다는 것이 신기한 생각을 넘어 어떤 종교적인 경건한 마음까지 들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예전부터 죽음을 돌아가셨다고 표현하였을까?
자연 속으로 돌아가셨다는 이 표현이야말로 얼마나 적절한 과학적인 설명이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죽음과 동시에 마음마저도 사라진다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여전히 난제로 남는다. 이럴 때 등장한 아름다운 비유가 있었다.
이른 새벽, 나뭇잎에서 만들어진 이슬방울이 찰나를 살다가, 동이 틀 무렵 냇가로 흘러들고, 다시 강으로, 다시 바다로 합쳐졌을 때 이슬방울의 입장에서는 생과 사를 경험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다의 입장에서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듯 무심한 표정으로 거기에 있을 뿐이다.
바다에 빠진 이슬방울의 운명을 통해서 나와 너를 구별하던 자아가 사라졌다는 의미를 설명할 때 종종 등장하는 참으로 시의적절한 비유라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과학의 세계에서는 우리 몸의 심장이 작동을 멈추고 뇌사 상태에 빠지면, 여기서는 그 어떤 예외도 허용되지 않고 동일한 현상이 발생한다.
너와 나를 구분하던 이슬방울 같은 자아는 사라지고, 바다 같은 자연의 일부인 원자만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설사 자신은 바다와 아주 특별한 관계라고 큰소리쳐봤자 바닷속에서는 이슬방울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특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현대과학의 준엄한 결론이다.
죽음의 순간 유체이탈하여 딴 세상으로 이동한다는 영혼의 존재에 대하여 스티븐 호킹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들의 상상이 만들어낸 동화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뇌사의 순간 모든 생명체들은 누구도 예외 없이 너와 나를 구별하던 분별심은 사라지고 바다 같은 자연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분별심으로 가득한 찰나의 이슬방울은 반짝 태어나서 반짝 사라지고 없지만 , 내 몸을 구성하던 원자들은 우주 속에서 이합집산을 반복하면서 영원히 살아간다는 것이 현대과학이 밝혀낸 참으로 무심한 진실이다.
가끔 불교 관련 TV 프로그램에서 중후한 표정의 고승이 던지는 질문 한마디 "너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고?"라는 물음 역시도 마찬가지다.
찰나의 시간을 살아가는 이슬방울 이전의 시간과 이슬방울 이후의 시간은 그냥 무심한 바닷물이었을 뿐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던 분별심의 존재가 아니었다.
백 년 후의 나를 상상해 본다.
물론 '나'를 인식할 수 있는 이슬방울 같은 자아는 진즉에 사라지고 없을 테니 실제로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은 없겠지만 말이다.
짙은 어둠이 물러가는 새벽녘 우리 집 앞마당의 블루베리 농장에서 천연액비를 관수하는 사람이 생면부지의 증손자라는 사실이 낯설게만 다가온다.
그렇더라도 그 감정을 상상해 보자면 우리 후손들의 몸속에 옅은 유전자의 흔적만 남았으니 자식이나 부모에게서 느끼는 진한 연민 같은 감정은 많이 희석되지 않았을까?
반대로 백 년 전의 난 무엇이었을까?
친가 외가를 망라한 선조들의 몸속에서 확률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가능태로서만 존재하였겠지만 결코 이슬방울 형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실에서 지금의 나는 생명의 잉태와 함께 "뿅" 하면서 등장하여 뇌사의 순간 "뿅" 하면서 사라지는 찰나의 존재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 한 가지!
분별심으로 가득한 이슬방울의 삶과 분별심이 사라진 바닷물에서의 삶이 서로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면, 생전의 삶이 사후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옛말은 모두 진실이 아니란 말인가?
물론 도통한 사람들은 나와 너를 구분하던 자아(이슬방울)가 사라진다는 것과, 나와 너를 구분하지 않는 우리(바다)가 존재한다는 말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라고 호통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허망한 공염불일 뿐이다.
현실세계에서는 정확한 이익과 손해로써 이해관계를 따져야만 귀에 쏙쏙 들어오는 법이거늘, 그러기 위해서는 사후의 분별심이 존재해야 하는데 무심한 표정의 바다에게 그것을 따질 수는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 아닌가!
다시 앞의 질문으로 되돌아가보자.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누리면서 뭐든지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갈 수 있다면 과연 임종의 순간 여한이 없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이슬방울의 삶이 결단코 바다의 삶에는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도 않을진대 흐뭇한 미소를 지을만한 대체 무슨 이유가 있다는 말인가?
?????
그 참.
암만 생각해 봐도 이건 아닌 것 같다.
설사 경제적으로 풍족하여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당장이라도 지금까지 하던 일을 딱 멈추고 해외로 놀러 다니며 마음껏 편히 살 수 있다손 치더라도 겨우 30% 남짓의 얼마 남지 않은 귀중한 잔여 여생을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지금까지의 일상 그대로 살아가면서, 때가 되면 조용히 사라지는 '소확행'의 삶을 살고 싶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옛말의 의미를 곰곰이 되새겨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