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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Feb 18. 2023

아름다운 투항

어설픈 물리주의자의 좌충우돌기

빅뱅 이후의 138억 년 동안 내가 존재한 시간은 고작 찰나에 불과하다. 기적적으로 존재하게 된 이 찰나의 순간이 지난 후엔 그 어디에서도 나의 존재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운 좋게도 반짝 잠시 스쳐 지나가는 존재에 불과할지라도 내가 사라지고 없는 상태를 상상하기란 쉽지가 않다. 나는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나 이외의 다른 이들은 앞으로도 계속 북적대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도통 무슨 뜻인지 적응이 잘 안 된다. 그것도 영원히…   

 

                                   ↓찰나의 순간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미래의 삶 또한 총알처럼 지나갈 것이 뻔한데도 삶이 아주 오랫동안 지속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진 듯하다. 하지만 이것은 과학적인 팩트로서 인생은 딱 한 번 뿐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죽음 이후, 제2부의 인생이 있다는 것도 사실은 창작된 동화임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마음에 안 드는 인생의 몇 대목을 교정해 가면서 재탕 삼탕으로 살아가는 판타지소설에 열광하는 것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일탈을 통해서라도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만끽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가성비 좋은 일탈이겠지만    

 

어설픈 물리주의자는 분기에 한 번씩 대단히 특별한 부부동반 모임을 가지고 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줄기차게 같은 반으로만 지낸 시골 초등학교 친구들의 모임이다. 지난 연말의 모임에선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이 메인 소재였다.


싱싱한 제철 횟감인 방어회를 안주삼아 오랜만에 반가운 이들과 몇 순배의 술잔이 돌자 언제나처럼 부인네들의 넋두리가 작되었다. 이번에는 웬일로 가장 나이가 어린 친구부인의 넋두리로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스무 살 때의 어린 나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결혼을 싶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절대로 같은 선택은 안 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다른 부인들도 이 재미난 넋두리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한 마디씩을 거들고 나서자 다시 태어난다면 모임에 참석할 부부가 한 쌍도 남아나지 않았다. 이때 유심히 살펴본 우리 친구들의 표정이 재미있었다. 환갑을 목전에 둔 인생의 노련함 때문이겠지만 거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도 이 당돌한 넋두리에 응대하지 않았다. 패기든 객기든 그런 것을 부릴 처지가 아닌 바 에는 후한이 두려워서라도 함부로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었던 거다.

  

실제로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면 누군들 한두 군데 손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하지만 이미 살아버린 인생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이런 자리에서나마 푸념을 늘어놓을 뿐이다.


찰나의 이 순간이 지나가게 되면 나 자신도 사라지고 말겠지만 그럼에도 이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변함없이 계속될 것이다. 딱 한 번뿐인 인생! 단 두 번도 아닌 딱 한 번만 허용된 일회용 인생에서는 대단히 엄격한 규칙이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이미 적어낸 답안지에 대해서는 절대로 지우개의 사용을 허용하않는다는 사실이다. 정히 지우개를 사용하고 싶다면 과거의 방향이 아닌 현재와 미래의 방향으로 유턴하여 인생의 잔여기간 중에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인생을 웬만큼 살아본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구관이 명관이고, 모르는 샛길보다는 평소 잘 알던  그 길이 편안한 길이며, 그냥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부인네들의 넋두리가 끝나자 이제는 우리 친구들의 차례가 되었다. 한 친구는 부인의 표정을 살피면서 혼자서 120 포기의 김장을 했다면서 자랑인지 푸념인지를 늘어놓는다. 또 한 친구는 이번 달 월급날이 마지막 출근이라며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다. 또 한 친구는 의사의 강력한 경고장을 받아 들고 그 좋아하던 술잔을 멀리하고 있다며 고개를 떨군다. 어설픈 물리주의자도 한마디 거들고 싶었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거실이며 부엌이며 청소기 돌리는 것부터 시작하여 식사 후 과일 깎는 것까지 오롯이 내 몫이 된 지 오래되었어!'  


모두들 서산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인생의 후반부 지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이미 지나온 것들은 지나온 것대로 소중한 인연으로 생각하면서 함께 걸어가기를 원한다. 오히려 교정의 대상이 된 것은 영원할 것만 같았던 젊은 시절의 착각과 만용이었다. 


딱 한 번뿐인 인생!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말인가! 한 번뿐인 인생이라고 하더라도 굳이 과거를 수정하면서까지 완벽한 그림을 그리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우리 친구들은 세월에 순응하면서 하나하나 내려놓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차라리 아름다운 투항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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