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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Apr 01. 2023

가족이란 무엇인가?

어설픈 물리주의자의 좌충우돌기

38억 년 전, 지구상에 생명의 씨앗이 뿌려진 후 생존과 번식은 생명체 공통의 본능이 되었다. 온갖 식물들이 화려한 꽃을 피우고 탐스런 열매를 맺는 과정도 자신의 자손을 퍼트리려는 본능적 행위일 뿐 추호도 다른 의도는 없었다. 사람들을 위한 눈요기나 먹거리를 제공하려는 한가로운 이타심이 아니라는 애기다. 식물과 달리 동물들의 세계에서는 새끼들이 자립하여 생존할 수 있을 때까지 먹이고 보살피고 교육하는 과정도 필요했다. 그리하여 생존의 최소집단인 가족이 만들어졌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우리 자연계를 통틀어서 생존과 번식의 최소집단을 가족에서부터 찾는다면 ‘가족’이라는 두 글자가 가지는 의미는 실로 어마어마 것이다.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생존하고 번식하는 생존투쟁의 최소단위가 가족이라면 이보다도  강력한 집단은 없을듯하다. 가족의 의미가 생명체의 생존본능에 해당할진대 무슨 이유나 조건 같은 것이 필요하겠는가? 종교나 이념보다도 훨씬 더 원초적이고 맹목적인 집단이었으리라.


이른 아침, 더 넓은 시골마당을 한 바퀴 순찰 할랍시면 빠지지 않고 발생하는 익숙한 풍경이 있다. 들고양이들이 저마다의 영역에서 잠을 자다가도 나의 발자국소리에 화들짝 놀라면서 도망치는 풍경이다. 저토록 겁 많은 동물일지라도 180도로 그 태도가 돌변할 때가 있으니 바로 모성본능이 발동할 때다.


지난여름 농막의 한 귀퉁이에 쌓아둔 부직포위에서 평소 안면이 있던 노란색 들고양이가 자신을 빼어닮은 예쁜 새끼들을 낳았다. 궁금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에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았다. 그러자 평소 같았으면 멀리서부터 도망치기에 바빴겠지만 되레 공격 자세를 취하면서 나를 위협하는 정반대의 상황이 만들어졌다. 어디서 저런 용기를 숨겨두고 었던지 특유의 앙칼진 목소리와 사나운 표정을 통해서 호랑이와도 상대할만한 결기가 느껴졌다. 자신의 새끼들을 보호하겠다는 어미로서의 본능이 작열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새끼들이 태어나고 3개월가량이 지났을 때 어미고양이는 자신의 새끼들을 냉정하게 대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멀리 내쫓아버렸다. 매몰차게도 가족의 정을 끊어버린 것이다. 자립생존이 가능하게 되었을 무렵  새끼들은 어미의 품을 떠나감으로써 가족이라는 개념은 붕괴되고 말았다. 어렵사리 어미와 새끼들이 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유전자 속에 기억되어 있는 본능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 호모사피엔스의 유전자 속에 기억되어 있는 본능으로 들어가 보자! 인간의 본능 속에 기억된 가족의 최소 단위는 어떻게 될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는 당연히 나 자신이므로 내가 우리 가족의 기준점이 다. 나에 대한 소중치를 10으로 가정했을 때 나머지 가족들의 소중치를 나열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올 것 같다. 배우자는? 자식은? 부모는? 형제는? 소소한 개인적인 편차는 있을지라도 본질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그것은 우리 호모사피엔스의 유전자 속에 내재된 본능 때문이리라.


자식들은 부모의 유전자를 사이좋게 1/2씩 공유하고 있지만 손자들은 1/4씩, 손자의 자식인 증손자들은 1/8씩, 손자의 손자인 고손자들은 1/16씩, 또 그다음은 1/32씩, 1/64씩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물론 나는 저들을 해코지할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내게 사생결단식으로 대어 들었던 노란색 들고양이를 다시 한번 소환해 보자. 자신의 유전자를 1/16쯤 물려받은 고손자 새끼들을 지키기 위하여 큰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내게 대항할 수 있었을까? 평소 내 발자국소리만 듣고서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망치던 전례에 비추어볼 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다.


노란색 들고양이의 사례를 통해서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대단히 불편하지만 솔직한 우리의 입장을 들여다볼 수 있겠다. 정작 기후위기를 걱정하다면서 지금석탄을 사용하는 화력발전소를 무려 다섯 기나 건립하고 있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어보자. 손자의 손자들을 위하여 당장의 불편을 감수할 의사가 없다것은 내가 사라지고 없다면 우리 지구도 없다는 극단적인 표현과 다를 바 없다. 핏줄의 느낌조차도 없는 고손자들이야 우리 지구상에서 더 이상 살아갈 수 있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겠는다는 이기심의 끝장판이 아니고선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미래를 살아갈 우리 고손자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배려의 마음이라고는 일도 없는 고조부 할매 할배들에 대한 분노의 심정이 어마무시하겠지만 말이다.

 
나의 유전자를 직접적으로 전달받은 직계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종교와 이념 심지어 자신의 조국까지도 버릴 수 있다지만 정작 그 외의 가족들을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 반문해 본다. 생각해 보면 38억 년 동안 대물림 된 유전자의 사랑은 일방적인 내리사랑이었다. 따라서 인간의 문명이 만든 측은지심에서 발현된 이타심이라는 마음은 본성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제1차적인 사랑만큼 강렬하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 민법에서도 가족의 우선순위에 대하여 명쾌하게 규정해 놓았다. 법정상속 순위를 지정하면서 자식이 있다면 배우자와 함께 직계비속이 1순위로, 자식이 없다면 배우자와 함께 직계존속을 2순위로, 그마저도 없다면 형제자매가 3순위로, 4촌 이내의 방계혈족이 그다음인 4순위가 된다.


내 몸이 기억하는 유전자의 본능에 의해서든, 그것을 기반으로 정리한 민법의 법조문에 의해서든, 자식의 독립 여부에 따라서 가족의 의미가 달라지게 된다는 것이 팩트다. 부모의 존재가치는 자식이 독립하여 그들의 가정을 이루기 이전과 그 이후로 구분되는 지극히 이기적인 관계일 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노란색 어미고양이가 사생결단식으로 지키고자 했던 가족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보편타당하면서도 과학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나를 정점으로 북적북적하던 주민등록등본 속의 이름들이 불현듯 홀쭉해져서 우리 부부만 남게 된 것처럼 세상만사 모든 것은 변해가기 마련!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가족에서 차지하는 나의 위상도 변화해 갈 것이다. 적당한 때가 되면 새끼고양이들이 어미고양이를 떠나가듯 우리의 자식들도 그들의 가정을 꾸리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 자식들의 기준에서 차지하는 나의 위상자연스레 후순위로 밀려나게 된다. 그래서 품 안의 자식이란 옛말이 있지 않았을까? 자연의 이치가 그러할진대 밀려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기보다는 거저 순응하면서 아름다운 퇴장을 고민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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