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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Mar 25. 2023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인식하는 방법

어설픈 물리주의자의 좌충우돌기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인식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일까? 생각해 보면 지금 내가 숨 쉴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실은 엄청난 행운이다. 하지만 그 행운의 가치를 늘 인식하면서 살지는 않기에 감사하는 마음대신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치부한다.


나는 지금 자유롭게 숨 쉴 수 있지만 누군가는 그럴 수 없어 절망한다. 나는 지금 자유롭게 말하고 듣고 볼 수 있지만 그럴 수 없는 누군가에겐 이 세상을 다 주고서라도 갈망할 만큼 절박한 문제다. 심지어 나는 지금 일할 직장이 있고 추위를 피할 집과 함께할 가족이 있지만 그럴 수 없는 누군가는 하염없이 부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난 참으로 많은 것을 누리고 있지만 내가 소유하면서 누리는 것들에 대한 가치의 의미를 체감하지는 못한다. 마치 잔뜩 배부른 돼지가 아직도 부족하다며 꾸역꾸역 쑤셔 넣는 것처럼 추해 보인다. 충분히 자유롭고, 충분히 건강하고, 충분히 풍요롭지만 정작 자신이 누리는 행복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는 삶의 태도가 문제다. 십중팔구는 지금의 삶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유지될 것이라는  시간의 착각으로부터 비롯된 현상이다.


수많은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행진하던 로마의 개선장군을 상상해 보라!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메멘토 모리’라고 외치는 노예들이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기세가 오른 개선장군의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기에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이 외침만 한 특효약이 없었을 것이다.


개선장군 본인의 의지였든, 황제나 원로원의 강요에 의해서든, 누가 이 코미디 같은 상황을 연출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어쨌든 당시 로마는 자신들의 제국을 아주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하여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처했다. 착각이란 총알같이 빠른 시간의 속성을 망각함으로써 발생하는 일! 시간의 착각을 물리침으로써  그들은 더욱 경계를 튼튼히 하였을 것이다.


거울 속에 비친 익숙지 않은 얼굴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일상적인 행복감을 느끼기엔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다는 듯 잔뜩 심술궂은 놀부의 표정을 하고 있다. 시간이 정지한 듯한 착각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한 만족감을 모르는 이런 류의 몹쓸 병은 지속될 것 같다. 이럴 때 떠오른 한 장면이 있었고 역사적으로 대단히 오래된 그 방법을 벤치마킹해 보기로 했다. 일상적인 소중한 것들의 가치를  인식하기 위하여 나 또한 황금기 로마시대의 유별난 액션이 필요했다.


그런데 단지 일회성의 이벤트가 아니라 오랫동안 잊지 않고 습관처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밥 먹기 전에 행하는 기도의 형식을 빌려보기로 했다. 난 태생적으로 자유인의 신분이었던 탓에 따로 모시는 주인님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주인님에게 소원을 청원하는 형태가 아니라 그냥 맘속으로 ‘메멘토 모리’를 중얼거리는 것으로 충분했다. 눈치 빠른 와이프가 알아차린다면 웬 뜬금없는 기도냐며 놀려댈 것이 뻔했기에 눈도 감지 않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의 습관이란 참으로 놀라웠다. 이제 겨우 석 달 차에 접어들었는데도 식사 전 ‘메멘토 모리’를 읊조리는 것이 자연스레 몸에 배었다. 하루에 세 번씩, 머지않은 장래에 다가올 죽음을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망각의 늪에서 조금씩 헤어 나올 수 있었다. 그러자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던 일상적인 것들의 하나하나가 소중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삶의 태도에 큰 변화가 찾아왔던 것인데 그동안의 전투적인 삶대신 어느새 지극히 온순한 방식으로 변질되어 갔다.


지금 이 순간, 자기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존재인지를 망각한다는 것은 인생의 좌표를 잘못 설정한 방향성의 문제일 것이다. 내가 누리는 것들을 하염없이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과 똑같은 표정과 방향으로 나 역시도 그러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마치 100억을 소유한 부자가 10억을 사기당했다고 자살을 선택하는 것처럼 오히려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자해의 고통 속에 빠져있다는 의미다. 이럴 땐 ‘메멘토 모리’를 중얼거려서라도 생각의 마인드를 교정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존재인지를 성찰할 수 있다면 180도로 달라진 의 태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위대한 성현들의 가르침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총알처럼 빠르게 다가올 죽음을 망각한 채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중생들이 얼마나 어리석게 보였겠는가! 중생들의 잘못된 시선을 올바른 방향으로 되돌려줌으로써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인식하도록 도와주려는 것이 성현들의 가르침이지 않았을까? 하염없이 부러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바로 그 방향으로 말이다.


자 이제 시선의 방향이 교정되었다. 위가 아닌 아래를 향하는 것만으로도 새삼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표정이 오랜 세월 내 맘속에 간직되어 있던 본래의 내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자신이 누리수많은 행복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의 표정은 흡사 성현모습과도 닮아있다. 예수님 석가모니의 더없이 만족스러운 넉넉한 표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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