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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May 06. 2023

딱 한 번뿐인 인생의 의미

어설픈 물리주의자의 좌충우돌기


영혼도 없고 내세도 없고 윤회도 없다면, 우리네의 인생살이가 삼세번도 아니고 매정하게시리  한 번 뿐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다시 태어나도 나랑 만날 거야?’

‘아니!’

‘내가 싫다는 말이지?’

‘아니!’

‘그럼 뭔데?’

‘최첨단 과학시대를 살아가면서 아직도 그런 비과학적인 상상놀이를 하고 싶으세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고리타분한 놀이는 이제 그만하자고!’

‘…’





학창 시절 처음 접했던 신심명의 문구들이 요사이처럼 가슴에 와닿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인생의 잔여 배터리를 고작 30%가량 남겨둔 시점에서 문구 하나하나의 의미가 선연하게 다가온다. 우리네의 삶이 최종적으로 종결된 죽음의 상태를 이슬방울 같은 자아가 바닷속으로 합쳐진 상황으로 비유하고 있음이다. 내 몸을 구성하던 원자들이 흩어져서 자연으로 돌아갔을 때 그 자연은 당연히 너와 나의 구분이 사라진 상황일 테니 말이다.


이슬방울이었을 때의 이런저런 사연들은 이슬의 사정이었을 뿐, 바다로 합쳐진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이 신심명의 담백한 결론이다. 이것은 살아생전의 성적표가 죽음에 이른 나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뜻이다.  인과응보니 전생의 업보니 하는 말들도 죽음의 실상 앞에서는 한낱 허망한 이야기가 되고 만다. 살아생전의 성적표가 A학점이었든 F학점이었든 죽음에 이른 순간 모든 것이 빈 백지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에서 이슬방울과 바다의 차이를 헤아려볼 수 있겠다. 기껏 잘살아봤자 백 년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의 인생일진대 자연의 형태로 죽어있을 영겁의 시간에 비하면 고작 찰나에 불과하다. 그 찰나의 시간들이 죽어있을 영겁의 시간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다면 살짝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기쁨과 슬픔, 평화와 불안, 부자와 가난, 희망과 절망, 웃음과 눈물, 승진과 명퇴, 건강과 질병, 이 모든 것들이 이슬방울의 사정일 뿐 바다로 들어온 이상 그런 것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이 신심명의 가르침일 테다. 살아생전의 공덕이 태산을 이룬다고 한들, 저지른 악행으로 강물이 흘러서 넘친다고 한들 이미 바닷물속으로 녹아든 이슬방울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살아생전의 공덕을 주장하면서 다른 바닷물과의 차별적인 대우를 주장한다고 했을 때 바닷물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웃기는 일이겠는가!


물론 셈법에 민감한 현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인과응보가 무시되는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을 테다. 하지만 자연의 이치가 그러할진대 그렇거니 하면서 순응할 도리밖에는 달리 무슨 방안이 있겠는가? 그럴 리가 없다고! 그리하면 안 된다고! 백 날이고 천 날이고 징징댄다고 하여 이미 바닷물이 되어버린 한낱 이슬방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말이다.


영원한 죽음의 시간 속에서 고작 찰나를 살아갈 뿐이지만 그마저도 삼세번도 아니고, 단 두 번도 아니고, 딱 한 번만 허용된 인생이라고 하니 허망할 따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진 자든! 못 가진 자든! 신분이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살아생전의 성적표 따위는 불문에 부치고 누구라도 공평하게 딱 1회의 삶만 허용한다는 것은 솔직히 마음에 든다.


진즉에 신심명의 진리를 깨우친 와이프는 어차피 죽으면 끝인데 우리도 더 늙기 전에 인생을 즐기면서 살자고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어마무시한 농협대출금에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던가! 그래서 이제부터는 가성비 좋은 립서비스라도 아낌없이 해주려고 한다.

‘다시 태어나도 나랑 만날 거야?’

‘응!’

‘내가 좋다는 말이지?’

‘고럼!'

'뭐야?'

'이 상상놀이 재밌네,  우리 앞으로도 이러고 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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