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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May 13. 2023

생명에 대한 오래된 논쟁

어설픈 물리주의자의 좌충우돌기

때때로 연포탕을 즐겨 지만 펄펄 끓는 국물 속으로 산 낙지를 산채 집어넣는 장면은 지켜보는 것으로도 적잖이 부담스럽다. 물론 잔인한 행위의 공범으로서 이런 말자체가 가식적 수도 있겠지만 자연생태계의 먹이사슬을 탓하며 은근슬쩍 빠져나갈 뿐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소중하다 할지라도 굶주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생명을 해치는 상황은 늘 존재한다. 다만 고통을 줄여줄 방법을 고민해 지만 그마저도 실상은 말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생명을 해하지 않고서도 먹거리를 채집하려는 스님들의 애틋한 마음이 가슴에 와닿는다.


38억 년 전, 우리 지구상에 생명의 씨앗이 뿌려졌을 때 정말이지 그것은 기적이었다. 이후 생명체들 간에는 오직 자신들 생명의 생존과 번식을 위하여 처절한 생존전쟁이 펼쳐졌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일상적인 야생의 세계를 유심히 살펴보면 자연생태계의 매정함을 알 수 있게 한다. 거저 한 끼의 식사일 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표정 하나와 재수가 없었을 뿐이라며 태연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또 다른 표정에서 생명에 대한 복잡한 연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약 700만 년 전, 나무에서 내려온 돌연변이 침팬지의 후손들은 지적 생명체로서 진화를 거듭하면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는 복잡한 감정이 본성으로 자리 잡았다. 이것의 발현으로 생겨난 이타심利他心이라는 특이한 심성이 위력을 발휘하면서 호모사피엔스는 거대한 사회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었고 먹이사슬의 최고봉으로 등극했다. 이리하여 지구상 유일의 지적생명체는 여타의 생명체들 가운데 가장 소중한 생명체로 정의되었다. 이즈음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않는 호모사피엔스일컬어서 '인간도 아닌 놈, 짐승 같은 놈’이라는 지구상 최고 등급의 욕설도 함께 등장하게 된다.


특별히 인간생명이야 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존재라의미를 되새겨봤으면 한다.


첫째, 태생적으로 가장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수명을 다할 때까지는 인위적으로 생명을 단축할 수 없다는 뜻이겠다. 언뜻 이 말은 인간생명에 대한 지극한 마음이 표현된 것 지만 실상은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내포돼 다. 초월적인 분과의 특별한 인연이 강조됨으로써 생사여탈의 권한을 전적으로 그분에게 의지하려는 형이상학적인 철학이 담겼다.


둘째, 지구상 유일의 지적생명체이니만큼 생존기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일 테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상실한 몸뚱이는 한낮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규정함으로써 초월자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형이하학적인 인간중심 철학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 둘의 개념은 때대로 상충함으로써 지독한 모순에 빠지곤 한다. 가령 불가피한 사정으로 지적생명체로서 존엄을 상실하게 된 경우의 입장정리가 모호해진다. 인간의 생명이 그토록 소중하다면 생명을 유지하는 동안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유지돼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 의학적으로 환자가 의식의 회복가능성이 없고,

● 생명과 관련된 중요한 생체기능의 상실을 회복할 수 없으며,

● 환자의 신체상태에 비추어 짧은 시간 내에 사망에 이를 수 있음이 명백한 경우에만 연명치료의 중단을 허용할 수 있다는 것이 현재 우리나라 대법원의 입장이다.


문제는 위의 요건에 해당하지 않으면서도 오직 죽음만을 기다리며,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 속에서, 억지로 숨을 쉬어야 하는, 최악의 인생도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이다. 간으로서의 존엄을 상실했을지라도 연명치료의 중단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그 어떤 희망도 없이 24시간 누워만 있을지라도 단지 의식이 있고 산소마스크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죽을 권리가 박탈된 경우다. 마지막 숨이 끊어질 때까지 멀뚱멀뚱 눈만 뜬 채 몇십 년이고 간에 그러고 있어야 한다면 대체 왜? 그리해야 되는지 타당한 이유가 궁금해진다.


물론 대단히 오래된 형이상학적인 철학에 기반한 불가피한 이유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실존하는 형태만을 논하는 형이하학적인 과학의 입장에서 그 이유를 묻고 싶은 것이다. 대법원은 인간의 생명은 고귀하고 생명권은 헌법에 규정된 기본권이라고 설명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고 싶다는 절박한 사람들의 절규에 국가는 답할 의무가 있을 것이다.


여러 다양한 상황들 중에서도 특별히 어설픈 물리주의자가 주목하는 상황이 있다. 85세가 될 때까지 치매에 걸릴 확률이 무려 40%나 된다는 통계를 접하고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많은 분들이 동의하겠지만 나 또한 중증치매에 걸린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게 싫다. 삶의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가족이나 주변 지인들의 기억 속에서 처참하게 망가져버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은 누구라도 같은 마음일 테다.


이 같은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는 것이 상책일 테지만 그러함에도 부득이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면 적어도 지금의 생각 같아서는 그 상황을 마냥 방치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추락된 그 시간을 최대한 짧게 하고 싶다는 것이 확고한 생각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발생한다. 막상 그 상황이 닥쳤을 때 우리 사회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자력으로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중증 치매환자의 처지로서는 그것이 마냥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부득이 타인의 조력을 받는 순간 그 조력자는 현행법상 살인에 가담하게 되는 것인데 중증치매가 연명치료의 중단사유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위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이미 시행 중인 의사조력자살이 법률로써 보장되기 전까지는 달리 방안이 없을 듯하다.


중중치매환자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면서 생을 마감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지적생명체로서존엄은 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상황에서도 굳이 그 상태대로 생명을 유지해야만 되는 합리적이면서도 타당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나를 기억하는 주변사람들의 아름다운 추억까지도 망가뜨려 가면서 무리하게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진정 누구를 위한 궁금해질 따름이다. 


의사조력자살, 즉 존엄사를 외면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인간 생명의 존엄을 빙자한 고문행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할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의학적인 판단이 내려졌음에도 남겨진 긴 시간을 아무런 대책도 없이 생존해야 한다면 이것이 지옥이지 대체 무엇이 지옥이겠는가! 사람의 생명이 귀중하다는 명분을 내세운다지만 실상은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해치는 무자비한 폭압일 뿐이다. 신이 부여한 생명이니 만큼 닥치고 생존여명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방식의 인권탄압일 뿐 지적생명체로서 존엄을 지켜주려는 배려의 마음은 안중眼中에도 없음이 확실하다. 


정녕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소중하다면 의사조력자살의 법제화를 통하여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보장되어야 마땅하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면내시경에 들 때처럼 가장 편안한 표정으로 영원한 숙면에 들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과학적으로 생각하면 정답이 보이는 법이거늘 아직도 우리 사회의 덜 무르익은 인간중심 철학의 현주소에 대하여 여러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오늘도 예일대 최고의 명강의로 유명한 샐리 케이건 교수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벌써 오십 번도 넘게 마지막 책장을 넘겼다. 삶의 가치가 마이너스 지점으로 추락한 상태가 고착화되었다면 차라리 XY축의 0점 지대(행복도 불행도 없는 상태)인 죽음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는 내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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