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맥도강 Feb 11. 2023

아인슈타인의 인생 상담

어설픈 물리주의자의 좌충우돌기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세월과 함께 그 모습이 변하기 마련인데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다. 젊은 시절 의기투합했을지라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서로 반목하는 사이가 되었다면 ‘저 사람 참 많이 변했다’라고 단정 짓듯 말한다. 그렇다면 상대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는 관측자 자신은 과연 변하지 않은 것인가? 아인슈타인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아인슈타인이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인생상담을 받으러 온 나에게 아인슈타인은 혀를 쑥 내밀면서 가만히 분필을 집어 들었다. 칠판에 그 유명한 E=mc²을 적으면서 해맑은 표정으로 상대성이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인슈타인의 강의를 들으면서 세상만사가 상대적인 개념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관찰자인 나의 입장이 아니라 피관찰자인 상대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易地思之의 개념이다. 고정된 나의 관점에서 상대의 변화만 관찰한다면 필연적으로 독단과 아집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그래서 상대의 관점에서 나의 변화를 관찰해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나에 대한 여러 문제들도 잘 드러날 것이다. 입장을 바꿔서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상대 역시도 나에 대한 섭섭한 마음과 아쉬움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은 운동을 관측하는 입장과 관측을 당하는 입장으로 구분해서 속도에 따라서 다르게 기술하려는 방정식으로부터 도출되었다. 역설적이게도 빛의 속도는 어떤 경우에도 초속 30만㎞라는 절대속도로 확인되었다. 가령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우주선에서 빛을 쏘더라도 외부의 관찰자는 우주선의 속도+빛의 속도가 아니라 그냥 빛의 속도로만 관측되는 신기한 현상이었다. 물리학의 가장 기초 공식인 '거리=속도×시간'에서 속도가 고정되어 버리자 나머지 변수인 시간과 공간이 조정되어야 했다. 시간과 공간은 관찰자에 따라서 달라지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전환된 것이다.


관찰자의 기준에서 상대를 평가할 때  '내로남불'만 한 격정적인 사자성어도 없을듯하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 같은 행위일지라도 관찰자와 상대에 대하여 서로 다른 잣대를 적용하게 될 때 불공정의 아이콘처럼 등장하는 말이다. 이럴 때 ‘너나 잘하세요!’를 외치면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면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져서 쌍방 간의 거리는 더욱 요원해질 뿐이다.


이미 인생의 무개추가 후반전을 향해서 그것도 가속도로 달려가고 있는 어설픈 물리주의자의 처지로서는 사람 간의 갈등구조에 대하여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그렇다! 어찌 상대만 변하였겠는가? 상대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나 또한 많이 변했을 것이다. 나는 변하지 않았는데 다른 이들만 변했다는 착각은 자연만물의 상대성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심각한 오류에 빠졌음이 분명하다.


이럴 때의 해결방안으로서 제시되는 덕목이 바로 중용이다. 나의 관점과 상대의 관점을 절묘하게 절충하여 합의점을 도출해 내는 전통적인 방식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쌍방의 장단점을 고려하지 않은 무작위적인 혼합이 아니라 각각의 장점을 미래지향적으로 취합할 수 있느냐의 여부다. 이 또한 상대를 보다 더 충분히 배려하는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욱 변화발전된 진보의 형태로 나아가는 자연의 작동방식이지 않을까?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중력장의 지배를 받는 물체의 운동은 시공간의 기하학적인 모양에 의해서 결정된다. 구슬이 곡면 위를 굴러갈 때 곡면의 기하학적인 모양에 따라서 곡면운동을 하는 원리와 같다. 그런데 시공간의 모양은 물질의 분포에 의해서 결정되고, 물질의 분포는 시공간의 모양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 둘의 관계는 달걀과 닭의 우선순위를 따질 수 없듯이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놓여있다.


138억 년 전, 빅뱅으로 시작된 우리 우주는 물질의 분포와 시공간의 기하학적인 형태 사이의 상호관계 속에서 격정적인 가속팽창을 계속해왔다. 그런데 은하들이 서로 멀어지는 이러한 팽창이 어느 적정시점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훌쩍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우주의 광대한 스케일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아인슈타인의 겸손한 모습이 떠오른다. 나 역시도 마음속 깊은 곳의 오만과 허세를 내려놓고 아인슈타인을 따라서 함께 기도하고 싶다. 나와 내 가족의 기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위대한 우주의 실상 앞에 거저 머리 숙이는 그런 기도를…


우주의 작동방식처럼 상대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본다면 이해하지 못할 바도 없을 것이며, 옛날처럼 화합하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우주의 실상이 이러할 진데 어찌 易地思之와 중용의 도를 외면할 수 있겠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중간에 낀 세대로서의 숙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