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을 좋아한다. 썸이 주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할 수 있는 마음을 담은 표현은 생각보다 다양하거든. 괜히 손을 맞대며 크기를 재보고, 맛있는 걸 먹으면 생각나서 사다 주고, 술자리에 가서 주기적으로 연락하고. 적당한 거리 때문에 기분 좋은 설렘을 배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썸이 끝나면 없어질 그 거리가 아쉽다. 그런데 모순되게도 진짜 썸의 단계에 들어가면 얼른 끝내고 싶은 생각뿐이다. 당장 이 사람을 나는 갖고 싶다. 그래서 성급하게 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준비를 한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동동이가 미국으로 떠나기까지 보름도 남지 않았다. 시간제한이 있으면 더 조급해지기 마련이다. 어느 타이밍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나는 결국 고장 나버렸다. 어색한 다나까 말투로 물었더니 동동이는 반문했다. 나는 어떻게 부담스럽지 않게, 자연스럽게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머릿속에서 예쁜 말을 고르고 있는데 성미 급한 입이 먼저 움직여 버렸다. ”좋아합니다만?“ 내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못 들었지만 대충 긍정적인 반응이었을 것이다. 뻣뻣한 고백이 민망해서 횡설수설, 입이 또 방정을 떨었다.
“어휴, 난 또 나 혼자 짝사랑인 줄 알았지.”
”에이, 마음 없었으면 나도 그렇게 안 합니다.“
‘오늘부터 1일’ 같은 출발 신호가 있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달달한 연인처럼 행동하는 건 어렵다. 아니, 썸에서 그어둔 선을 갑자기 넘으려고 하니 오히려 더 망설여진다. 연애의 스타트 건이 울린 다음 날, 우리는 아무 계획 없이 만났다. 데이트는 어떻게 하는 거였지? 밥 먹고 카페 가고, 가끔 영화 보는 게 보통의 데이트라고 했던가. 우린 떡볶이를 먹으며 고민하다가 근교로 나가기로 했다. 먼 듯 아주 멀지도 않은 군산으로 출발했다. 이름만 들어봤던 곳인데 철길마을이 유명하단다. 기찻길을 따라 추억의 불량식품이 죽 이어졌다. 우린 아직 조금의 거리를 두고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어렸을 때도 안 해본 뽑기를 해서 불량식품을 잔뜩 따냈다. 5등이 좋은 건 줄은 처음 알았다.
색깔 벽돌만 밟기, 인도 가장자리만 따라 걷기 등 졸업한 지 오래지만 기찻길은 또 다른 이야기다. 기찻길에 올라 아슬아슬한 외줄을 타듯 신중히 걸었다. 균형 감각이 부족한 탓인지 계속 휘청거리니 동동이는 내게 손을 줬다. 지난번 바다에서 만져본 이후로 처음 잡아보는 두툼한 손. 어쩌면 나, 여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