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친구랑 같이 있어.’
데이트 중에 가끔 오는 친구들 전화에 동동이는 ‘여자 친구’ 단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물론 나도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남친’이라는 단어를 남발하지만, 이상하게 동동이 입에서 나오는 ‘여자 친구’는 낯간지러웠다.
어려서부터 연인 관계에서 종종 사용되는 대부분의 용어가 참 어색했다. ‘데이트,‘ ’사랑,‘ ’애인.‘ 내 입 밖으로 꺼내는 법이 없었고, 타인이 내뱉는 말에 남몰래 소름이 돋곤 했다. ’자기,’ ‘여보’ 같은 애칭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미 부르라고 만든 예쁜 이름이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난 애칭이 아닌 내 이름으로 불릴 때가 가장 좋았다.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올 정도로 말이다. 동동이는 나를 이름으로 불렀다.
모순되게도 나는 타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어려워했다. 어렸을 때 남자아이들의 성을 빼고 언급하면 ‘너 걔 좋아하냐?’라며 놀림 받아서였을까, 특히 남자 이름은 입안에서만 맴돌 뿐 내뱉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동동이를, 내 사람을 ‘야, 너’로 부르기는 정말 싫었다. 결국에 나는 동동이를 ‘즈기요,‘ ’아즈씨,’ ‘그쪽’ 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게 참 아쉬웠다.
전화기 너머 동굴같은 목소리로 ‘하늘이는,’ ‘하늘이가’ 소리는 몸이 근질거리고 뇌가 부르르 떨리게 좋았지만, 한편으로 동동이를 동동이라 부르지 못하는 내게 자꾸만 실망감이 들었다. 그래서 하루는 ‘동동이’라고 부르기로 마음먹고 머릿속으로 그 결심을 여러 번 되뇐 뒤 전화를 받았다. 대화를 한참 이어가다가 드디어 타이밍을 잡았다. 크흠,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숨을 들이마시며 한 템포 쉬었다. 그리고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소리 내 말했다. ‘동동이는…’
연습하면 안 되는 게 없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동동이를 ‘동동이’라고 부르고, 제삼자에게는 ‘남자 친구’라고 당당하게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