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닝!’
저녁을 먹고 방에 들어가 꼼지락거리고 있으면 어김없이 문자가 오고, 조금 더 기다리면 전화가 울린다. 그렇게 나는 저녁을, 동동이는 아침을 시작했다. 목소리만 듣기를 한 달, 두 달이 되니 동동이가 얼마나 피곤한지, 편안한 상태인지, 경계하고 있는지 혹은 생각이 많을 때 어떤 말투인지 곧장 파악하곤 했다.
미국으로 간 지 한참이 지나서야 화상 전화를 허락했다. 화면 속의 내가 너무 못나 보였고, 렌즈를 통해 마주치는 눈에 나도 모르게 어색해할까 봐서였다. '그래, 우리 얼굴 한번 보자', 더는 미룰 수 없어 화상 전화 약속을 잡았다. 하루가 끝나가는 데 화장하는 건 유난인가 싶어 맨얼굴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역시 화장할 걸‘ 같은 작은 후회를 했지만 후디 속에 있는 꾀죄죄한 동동이의 등장에 내 맨얼굴은 까맣게 잊고 깔깔거릴 뿐이었다.
이제 목소리로 동동이 상태를 체크하는 것도 마스터했고, 화면 속 얼굴과 대화하는 일에도 거리낌 없다. 가끔은 동동이 코골이를 30여 분간 들으며 글을 쓰기도 하고 ASMR인 양 함께 잠을 자기도 했다. 전화로 할 수 있는 건 다 했을 것이다. 연락만 된다면야, 소식을 제때 들을 수 있으니 우리의 물리적 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동동이는 항상 꽉 찬 하루를 보냈고 너무 피곤한 나머지 가끔은 집에 들어가자마자 뻗기도 했다. 그렇게 동동이가 피곤함에 패배한 날 나의 아침은 허전했다. 동동이가 친구들과 캐나다로 놀러 가 있는 동안 데이터 로밍을 안 해서, 꽉 찬 여행에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서, 역시 나의 아침은 조금 허전했다. 허전함 속에 걱정도 함께 피어올랐다.
가족이 나를 빼고 해외여행을 간 적이 있다. 돌아오는 비행기를 탄다는 연락 후 도착하고서도 몇 시간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관련 뉴스라도 떴을까 최신 뉴스도 찾아보고, 그 시간대 싱가포르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항공기를 확인해서 추적해 보기도 했다. 연락이 안 되니 알 수가 없는 소식이 혹시나 나쁜 소식일까 봐 불안했다. 허전함 속에 피어오른 걱정은 이런 불안을 지닌 걱정이었다.
물론 가족도, 동동이도 아무 일 없이 무사히, 그리고 안전하게 돌아왔다.
‘모닝’ 인사와 함께 무사 소식을 전하는 그에게 걱정되니까 들어갈 때 문자 하나만 남겨달라고 요구했더니 곧바로 전화가 왔다. 그렇게 또 저녁 인사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