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부인과 의사의 오진
미혼이던 시절 검진차 갔던 산부인과에서는 나에게 “다낭성 난소증후군”임을 선포하며 분명히! 자연 임신은 되지 않을 것이니 임신을 원하면 병원에 가라고 했다. 하지만 당황스럽게도 나는 신혼여행에서 덜컥 임신하고 말았다. 돌팔이 같으니! 나는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얼굴과 두피를 뒤덮은 피부트러블 덕분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 임신과 출산은 인간에게 최대치의 축복이지만 최대치의 고난이기도 해서 나는 출산을 통해 최대치의 물리적 고통을 알게 됐고 임신을 통해 임신하지 않은 보통의 신체 컨디션이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됐다. 임신 중에 나는 남편과 정말 미친 듯이 싸웠다. 그전에는 싸워도 서로 화해하고 서로 사랑한다는 감정이 있었는데, 임신 중에는 호르몬 때문인지 절대 용서가 되지 않았다. 내가 너 하나 보고 지금 이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고생 중인데 니가 나한테 그런 소릴 하다니!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물이 주룩주룩 쏟아지는 거대한 분노였다. 남편은 단 한순간도 져주지 않았고 울면 조롱했다. 부인이 임신 중이라면 응당 보여야 할 따듯함과 배려가 없었다. 한 달에 한번 있는 정기 검진도 절대 함께 가주지 않았다. 회사 쉬는 날이 하필이면 한 달에 한 번인 검진일과 맞아떨어져서 같이 가자고 하는 나에게 한 사람만 고생하면 되지 뭣하러 둘이나 고생해야 하냐는 말을 들었다. 내가 돌아갈 곳은 친정뿐이었는데 부모님의 극렬한 반대를 뚫고 결혼했는데 애까지 품고 가자니 내 양심도 책임감도 선뜻 그래! 이혼해!라고 결정하지 못하게 했다. (그때 바로 한국으로 갔어야 했는데!) 그것 말고도 남편과의 관계는 늘 대환장 파티였다. 얼굴 트러블은 아팠고 늘 열이 나서 내내 몸살 걸린 것 같은 상태였다. 그 와중에 먹덧을 해서 몸무게는 85킬로에 육박했는데 나온 애는 고작 2.6킬로였다. 내가 가성비 떨어지는 인간인건 원래부터 알았지만 출산으로 인해 처절하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신도 출산도 내가 생각해 왔던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 아니었다. 흰 천이 나풀대는 환한 공간에 오로지 배만 볼록한 내가 거닐다 어느 순간 한 팔로 아이를 안고 미소 짓는 그런 것. 임신 기간의 나는 늘 열이 나서 옷을 걸치지 못해서 살찐 고릴라에 가까웠다. 출산은 지나치게 동물적이었다. 애가 나오고 나서는 살색 수유내복을 제2의 피부처럼 입고 몇달를 보냈다. 바짝 말라서 가죽뿐이던 아이는 메마른 젖을 먹고도 통통 자라났고 귀여웠지만 잠을 안 잤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애가 나온 걸까? 남편도 나도 36시간도 연속적으로 잘 수 있는 인간들 틈에서 나와서 그런가, 복중에서 잠을 다 자고 나온 아이처럼 이 아기는 도통 자질 않았다. 이시절 이야기를 하면 너무 남편을 비난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자업자득이다! 흥칫뿡!- 남편은 밤새 한 번도 깨지 않았고 밤새 한 시간에 한 번씩 일어나서 수유한 나에게 아침도 주지 않았다. 회사라도 갔으면 덜 원망스러웠을 텐데 육아휴가를 받은 세 달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늦잠을 잤다. 아이 셋 낳아 키우는 게 꿈이었으나 하나를 낳아보고 그 꿈을 결연히 접었다. 임신, 출산, 육아는 나를 갈아서 하는 것이었고, 부모도 친구도 없는 이역만리타국에서 남편의 참여 없이는 너무 고된 것이었다. 게다가 셋 정도 낳고 그 몸뚱이로 생을 이어가려면, 다시 태어나야만 가능할 것 같았다. 더구나 남편도 더 이상 아이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굳이 고집할 이유도 없었다. 그 와중에 다낭성 난소 증후군은 영 오진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나는 8년간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수없이 신혼여행 중 덜컥 애가 생긴 걸로 자책했던 나는 아이가 자라감에 따라 조금씩 자책을 덜어냈다. 아이가 사랑스럽고 귀여웠기 때문이기도 했고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난임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아서도 그랬다. 그리고 이만큼 키우고 보니 그렇다. 어쩌면 나는 의사의 오진 덕에 -피임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덜컥 아이가 찾아왔을 수도 있고 그로 인해 내 인생이 영 여기 묶여버린 것일 수도 있지만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존재를 얻었다. 10년 뒤면 내어줘야 할 존재긴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