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기자 Jun 28. 2022

<풀카운트>

단편 소설

"볼!"


심판의 우렁찬 소리. 다행히도 이번 공은 볼이었다. 이제 볼카운트는 2스트라이크 3볼이다. 아 이제 일본식 대신 메이저리그식으로 부른다고 했으니 3볼 2스트라이크. 이러나 저러나 나에게 절체절명의 카운트인 것은 확실하다. 이제 더이상 물러날 곳은 없다.


우리 팀은 9회말 현재 12-13으로 뒤져 있는 공동 4위다. 어제까지 우리와 공동 4였던 A팀은 벌써 C팀을 이기고 4위를 확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리그에서는 4위까지만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있다. 우리는 무조건 오늘 경기에서 이겨서 A팀과 공동 4위를 기록한  끝장전을 벌여야 한다. 오늘 진다면 1경기차 5위로 시즌이 그대로 끝나게 된다.


하필 가혹한 시련은 왜 내 앞에 왔을까. 1점차 지고 있는 상황에서 2사 1,3루 찬스. 그리고 타석에서는 내가 서 있다. 나의 시즌 타율은 0.233. 나는 수비형 야수다. 아직 프로 3년차일 뿐이고 팀에서는 1,2군을 오가게 하며 경험을 쌓게 하는데 주력했다. 경기 후반 주로 대수비로 나서는 나는 오늘도 7회 대타로 나섰던 선배의 대수비로 경기에 투입됐다. 그리고 8회 B팀이 4점을, 우리가 5점을 내느라 모든 야수 자원을 다 썼다.  


그 결과 2사 1,3루라는 최고의 찬스에서 내세울 수 있는 카드가 나밖에 없었던 거다. 팀은 아무도 기대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대부분 9회말이면 많은 선수들이 끝내기 때 뿌릴 물병을 들고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 우리 팀 더그아웃을 보니 다들 벤치에 앉아 있거나 연장전을 준비하고 있다. 기대치라곤 1도 없는 모습이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한 뒤로 나는 한 번도 끝내기 찬스에서 안타를 쳐본 적이 없다. 우리 학교가 전국대회에 많이 나가지도 못했을 뿐더러 9회 끝내기 기회가 오면 대타로 바뀌어 경기를 마치는 게 내 일이었다. 나는 "고생했다"는 코치님의 한 마디를 들으면 웃으면서 더그아웃으로 돌아가 다른 친구들과 함께 대타를 응원해야 했다.


단 한 번 기회는 있었다. 고2 때 청룡기였던가. 우리 학교가 처음으로 미친 듯이 잘해서 4강까지 올라갔다. 4강에서 만난 Z학교는 전통의 명문이었다. 우리는 6회 무려 5실점을 하면서 1-6까지 뒤졌지만 꾸준히 따라가 8회 6-7까지 맹추격했다. 이때도 타자를 모두 다 썼고 9회 1사 1,2루 찬스에서 8번타자였던 내 자리에 쓸 대타가 없었다.


나는 타석에 들어서면서 그동안 미친듯이 상상했던 장면을 계속 그렸다. 내가 보란듯이 타구를 받아친다. 타구가 좌중간을 가른다. 야수들이 타구를 잡으러 가는 것을 보며 미친 듯이 달린다. 주자들도 홈으로 내달린다. 우리 팀이 경기를 뒤집고 끝내기 승리를 거두고 동료들은 다들 나에게 뛰어와 기쁨의 세리머니를 한다!


그러나 결과는 어이없는 병살이었다. 나는 투수의 폭포수 같은 커브에 배트를 헛내면서 타구를 또르르르 굴렸고 포수가 공을 잡아 2루에 송구, 2루수가 다시 1루에 송구하면서 경기는 6-7 패배로 끝났다. 우리 팀은 그 뒤로 한 번도 전국대회 16강 안에 들지 못했다.


우리 학교에서 한 명도 프로 지명자가 나오지 않은 것도 그때 결승전에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드래프트날 절망적인 결과를 안은 뒤 모든 선수들, 코치님들, 감독님, 하물며 교장 선생님까지 나를 째려보는 것 같았다. 나는 지명 후 입단 테스트를 통해 F팀에 입단할 수 있었지만 많은 친구들이 프로가 아닌 아카데미 코치, 대학교 학생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 힘들었던 기억을 가진 내가 끝내기를 쳐볼 수 있을까. 투수는 리그 최고의 마무리 투수 중 한 명이고 예리한 슬라이더를 가지고 있다. 특히나 나는 우타자고 그는 우투수기 때문에 슬라이더는 나에게서 먼쪽으로 휘어진다. 첫 공은 153km의 한가운데 직구가 들어왔다. 나는 자신감이 대폭 떨어졌다.


두 번째 공은 132km 슬라이더였다. 내가 초구 직구에 손도 못 댔기 때문에 2번째 공도 직구를 생각한 나는 공을 치지 않았는데 다행히도 휘어져 바닥에 떨어지는 볼이 됐다. 3번째 공은 조금 더 스트라이크존 쪽으로 들어온 슬라이더를 가까스로 쳐내 파울을 만들었다. 이제 1볼2스트라이크. 나에게 너무나도 불리한 상황이다.


4번째 공은 당연히 유인구 슬라이더였다. 나는 슬라이더를 거르고 다음 직구를 기다렸다. 하지만 5번째 150km 직구에 한참 타이밍이 늦으면서 파울이 되고 말았다. 6구째는 눈높이의 높은 커브가 하나 들어왔다. 유인구로 잡으려다 손에서 빨리 빠진 것 같았다.


이제 정면승부다. 3볼 2스트라이크에서 볼을 하나 골라내면 나는 볼넷을 얻어 2사 만루 찬스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삼진을 당하거나 땅볼, 뜬공을 치면 그대로 경기는 끝나고 우리 팀의 가을야구 꿈은 물거품이 된다. 팀의 운명이 나의 어깨에 걸려 있다 생각하니 하늘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등에서 식은 땀이 났다.


나는 프로 선수가 맞는 것일까. 왜 이 상황에서 영웅이 돼야 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왜 하필 나냐'는 푸념을 하는 것인가. 스포츠의 하이라이트는 영웅이 되는 순간 터져나오는 아드레날린이다. 그 순간을 위해 매일 밥먹고 운동만 한다. 하지만 아무리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라도 나 같은 유리 멘탈에는 안 되는 걸까.


나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나에게 지시를 내리는 3루 코치님을 바라봤다. 3루 코치님의 사인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는 것이었다. 이제 팀도 모든 걸 운명에 맡기겠다는 셈이다. 나는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일단 다음 공은 무엇이 들어올까.


상대 투수는 잠시 포수와 이야기를 나눴고 다시 투구판을 밟았다. 이제는 상대를 해야 한다. 상대는 가장 좋은 공을 던질 것이다. 슬라이더는 과연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할까. 투수는 발을 뗐다. 이제 나는 쳐야 한다. 아니면 볼을 예상하고 참아야 한다. 투수가 공을 던진다. 자, 나는 치기로 결심했다. 내 인생 처음으로 영웅이 돼보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