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다리는 그 클리셰
등장인물을 소개한다. 이 사람은 돈이 많고, 저 사람은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고, 그 여인은 천하무적이다. 문제가 생긴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히어로들이 한 곳에 모인다. 어김없이 위기가 닥쳐온다. 우리의 히어로들은 위기를 극복하고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흔하디 흔한 블록버스터 영화의 전개방식이다.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대략적으로 어떻게 진행될지는 예상가능하다. 어떻게 표현되는지 얼마나 스케일이 큰지 언제 그 일이 발생하는지 모를 뿐이다. 예상과 기대를 넘거나 충족해야 그 블록버스터는 비로소 재밌다는 평가를 받는다.
육아는 클리셰 범벅인 블록버스터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알고 있다. 육아가 시작되기도 전에 유튜브, 블로그, 카페, 릴스, 쇼츠 등 혼자서 확인하는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 원하지 않아도 먼저 육아를 경험하고 있는 가족, 친지, 친구, 언니, 오빠, 형, 누나 등에게서 육아의 공포와 스케일을 생생히 접할 수 있다.
"야, 육아는 전쟁이야."
"네 상상 이상이야."
"애 키워봐라, 네 생활은 없어."
새벽에 3시간마다 깨는 신생아 시기를 지나 하룻밤 통잠을 잔다는 그 전설의 '100일의 기적'이라는 클리셰. 잠이 부족한 우리 부부는 그날을 크게 고대했지만, 그 효과와 성과에 적잖이 실망했었다. 피터 파커가 거미에게 물려서 스파이더맨이 되는 그런 효과는 없었다. 이 영화 재미없네.
뒤집기를 시작으로 배밀이를 지나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체육계 클리셰는 나를 안달 나게 했다. 넘어갈 듯 넘어가지 않는 뒤집기. 앞으로 가지 않고 뒤로 진행되는 배밀이. 퇴근해서 현관에 들어서는 아빠를 향해 놀라운 속도로 기어 오기라도 하면 어서 다음 단계의 클리셰를 보고 싶어서 배우를 재촉하기도 한다. 1년 즈음이 되어서 제 두 다리로 우뚝 서서 한걸음 두 걸음 걸을 때는 아이언맨이 첫 비행에서 너무 높이 올라 얼어버렸을 때의 느낌이다. 너무 기쁘고 놀라서 흥분했는데, 아슬아슬해.
하지만, 육아에 있어서 가장 기다리고 고대하는 클리셰라면 단연 이 한마디다.
"아빠"
언젠가 나를 바라보며 자그마한 성대를 울려 저 단어를 또박또박 말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어느 날 방심한 사이에 덜컥 공격이 들어와 나의 심장을 떨어 뜨릴 것을 분명 나는 예상하고 있다. 그 장면을 보기 위해서 나는 아이 얼굴을 보며 저 두 글자를 열심히 발음해 준다. 이 클리셰는 나의 노력 여하에 따라 빨리 볼 수 있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라는 클리셰의 달성은 개인마다 타협점이 다르다. 아내는 일찌감치 타협본 케이스다. 음바, 음아, 어어엄, 으으으음마아아아아. 전부 다 '엄마'로 타협을 본 아내를 나는 애써 부정하진 않았다. 물론 내 귀에는 입다물었다가 입안의 공기를 터트리며 내는 옹알이 일뿐이다. 빠른 타협으로 행복감을 선점한 아내는 나에게 타협을 강요하기에 이른다. 아바바바바, 아브아아, 으바바바바. 아내는 드디어 아빠를 했다며 자신의 행복감을 나눠주고자 했지만, 나의 대답은 항상 NO였다. 이건 아빠가 아냐. 내 심장이 떨어지지 않았어.
그렇게 아빠라는 두 글자에 목메고 있을 때, 딸아이가 태어나고 10개월이 되었을 때, 그 클리셰가 나타났다.
"압빠."
쿵. 떨어졌다. 이건 확실하다. 한번 더.
"압빠."
쿠웅. 아주 심장이 주저앉는다. 호들갑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아빠를 보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딸아이는 멀뚱한 얼굴로 다시 아빠를 정확히 발음한다. 내가 기대한 클리셰건만 이렇게 기대이상이라면 엄청난 블록버스터구만. 나를 향한 호칭일지는 아직 정확하지 않지만, 그녀의 입술에서 정확한 발음이 나왔다. 그만으로도 나는 녹아버렸다. 그 후로도 나는 틈만 나면 아빠 소리를 갈구하며 녹았다 살았다를 반복하며 즐거워했다.
21개월이 된 지금은 아빠에게 아빠라고 부르고, 엄마에게 엄마라고 부른다. 어느 날 잠들기 전에 내가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우리 딸이 아빠를 먼저 한 거 알고 있어?"
"응, 맞아. 알고 있어."
그래, 여보도 그 옹알이가 엄마라는 소리가 아닌 걸 알고 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