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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붕어빵 Jul 22. 2024

육아로 남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

나는 맘충이라는 말이 싫다

    출장으로 도쿄에 갔다가 귀국하는 길이었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 검색대 중 몇 개는 막혀 있었고, 병목현상으로 대기줄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줄에 피로로 인한 짜증 지수가 높아지고 있었다. 옆에 뭔가 툭하고 치고 나아갔다. 7살? 그 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뛰어다니며 사람들과 캐리어를 툭툭치고 달려 나가고 있었다. 한창 신났는지 소리를 지르며 공간을 휘저었다. 아니 애를 통제안하고 부모는 뭐 하고 있는 거야? 오랜 줄서기에 지친 모든 사람들의 눈에서 짜증이 소리치고 있었다. 활보하고 다니는 아이를 다들 눈으로 좇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저런 것들이 살인자가 되는 거야!"


    뭐야, 무슨 소리야. 애한테 하는 소리 맞아? 목소리와 말투로 보아 50대 남성으로 짐작이 되지만, 여기서 보이진 않았다. 아무리 짜증이 난다고 해도 그렇지 그런 막말을 해? 애 부모가 들으면 어쩌려고? 여기서 내가 놀란 사실은 두 가지다. 첫째,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이 발언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발언 수위가 문제가 될 뿐이지 '나도 한마디 하고 싶었다'라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듯했다. 둘째, 부모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살인자 발언' 이후로도 아저씨는 몇 마디 더 던졌지만, 끝내 부모는 나타나지 않았다. 발끈하여 등장할 줄 알았던 엄마 혹은 아빠는 침묵한 것인지, 아니면 아예 다른 곳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너는 못된 아이구나."

    내가 한 말이다. 이른 아침 작은 놀이터에는 딸아이와 4살 정도 되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딸아이가 미끄럼을 타려고 할 때, 남자아이는 미끄럼틀을 막고 앉아서 '안돼, 이건 내 거야'를 연신 외치고 있었다. 놀이터에 부모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타이르며 비켜줄 것을 요청했지만 끝까지 비켜주지 않아 기분이 크게 상한 나는 결국 아이를 데리고 다른 놀이터로 갔다. 나오는 길에 본 장면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괴롭힐 상대가 없어진 아이는 미끄럼틀을 내려와서 벤치에 앉아 있는 할머니에게 가서 칭얼댔다. 보호자 앞에서 아이를 못됐다고 꾸짖은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전혀 없었다는 것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오히려 아이를 꾸짖지 않은 할머니가 잘못되었다고까지 생각했다.


    '맘충'이라는 말이 있다. 엄마라는 입장을 특권처럼 내세워 상대방의 이권을 강탈하거나, 주변 사람들과 사회 전반에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히는 행위를 일삼는 유자녀 여성들을 벌레에 빗대 비꼬는 신조어(from 나무위키). 정말 벌레에 빗대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 이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도 실제로 사람을 벌레라고 칭할 생각은 없었으리라. 이 불편한 혐오표현이 조금 이해가 되는 것은 정말로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아이를 위해서라는 무적, 무논리의 이유로 남에게 양보와 이해를 강요하는 부모가 뉴스 등에 적잖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나는 유아업계에서 10년 일한 적이 있다. 위에서 말하는 그런 엄마는 실제로 존재한다. 나는 보고, 듣고, 경험했다. 그것도 많이.


    나는 맘충이라는 소리가 정말 듣기 싫다. 내 아이가 다른 이에게 안 좋은 이야기를 듣는 것도 싫고, 아이가 잠재적 살인자로 여겨지는 것은 더욱 싫다. 그래서 나는 나의 육아 활동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기로 했다. 

    식당이나 카페에 들어가면 가장 구석진 자리를 찾는다. 피치 못해 소파에 올라가게 되면 꼭 신발을 벗긴다. 유아차가 통행을 방해하지 않도록 접어서 최대한 밀착시킨다. 준비해 온 식기와 턱받이 등으로 식사를 한 뒤, 깨끗이 테이블이나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치운다. 행여나 아이가 소리치거나 지루해하면 급하게 먹던 것을 마무리하고 나간다.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탈 때는 양보를 당연시 여기지 않는다(애초에 양보를 기대할 수 없다). 지하철에서는 유아차칸을 이용하여 통행에 불편을 주지 않는다. 혹시나 짜증을 내거나 울 때를 대비해서 항상 간식을 준비해 둔다.

    마트나 편의점에서 판매 중인 상품에 함부로 손대지 않도록 교육시키고 놀이터에서 기구를 타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가르친다. 멍멍이에게 함부로 다가가지 않도록 알려준다(견주께서 불편해하는 경우가 많다). 

    여행지나 야외에서 통행에 불편을 줄 수 있는 사진촬영은 삼간다. 어머 이건 꼭 찍어야돼라는 순간이 오더라도 통행이 붐비거나 다른 사람들이 구경하는데 방해를 줄 수 있다면 셔터 찬스를 포기한다.


    너무 과도하게 신경 쓰는 거 아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 주위는 보통 이렇게 한다. 모두 맘충이라는 말이 싫으리라. 모두 내 아이가 사랑받았으면 하고, 내 아이가 좋은 말을 들었으면 할 거다. 그러기 위해서 배려받기를 기대하지 않고, 이해를 강요하지 않고, 남에게 불편을 끼치는 나 자신을 합리화하지 않는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냥 아이와 내가 욕먹는 게 싫다. 그래서 이만치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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