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오늘 저녁은 치킨이다. 이사 온 동네에 괜찮은 치킨집을 발견했다. 후라이드 치킨 1마리, 감자튀김 1세트, 닭봉 1세트. 닭봉 간장 조림을 꽤나 잘 먹는 만 29개월의 그녀를 위한 메뉴다. 가게 안은 금요일 특수를 느낄 수 있게 북적거린다. 치킨과 함께 생맥주를 마시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옆에 앉을 뻔했다. 키오스크를 발견하고 익숙한 듯 불안한 듯 몇 번 툭툭 건드리며 담기와 취소를 반복하여 결국에는 최종 결제까지 당도했다. 익숙한 주문 벨소리와 함께 주방에서 주변 소음을 뛰어넘는 데시벨의 외침이 들린다.
"아버님! 15분 정도 기다리셔야 해요!"
그래요. 거기 아버님. 15분 기다리시래요. 주위를 둘러봐도 거기 아버님은 없다.
난가? 나보고 말하는 건가? 뭐라고 불렀지? 아버님이라고 불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빵집 갔다 올게요. 어리둥절한 걸음걸이로 가게 문을 나서며 여전히 의문이다. 나한테 말한 거 맞나?
근처 단골 빵집에서 주말 아침에 먹을 일용할 빵을 구입하고 다시 치킨집으로 돌아오니 중년 여성 한분도 일용할 치킨을 기다리고 계셨다. 주방에서 외친다. "치킨 나왔습니다~" 그 여성분께서 짐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치킨을 받으러 가셨는데, 주방의 그는 더 크게 외쳤다.
"아뇨, 저기 아버님이 먼저예요."
난가? 나 맞는갑다. 여기 다른 아버님이 딱히 보이질 않는다. 그러면 아까도 아버님이라고 부른 게 맞네. 감사합니다. 하고 두 봉지를 받아 든 나는 가게 밖으로 나와 그다지 춥지 않은 1월의 공기를 머리로 들이받으며 생각해 봤다.
아버님
분명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이 호칭이 낯선 이유는 내가 딸아이와 함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 고객님, 손님, 저기요, 여기요 라고 불릴 법한 상황에서 그분은 적확하게 나를 파악하고 호칭을 정했다. 그저 오랜 장사 경험에서 나오는 고객 관심법일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아버님 아우라를 뿜고 있었을까.
집에서 거울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어디에 아버님의 표식이 있을까? 이제 머리 전체로 확장 공사 중인 흰머리일까. 탄력을 잃어 저절로 생성된 쌍꺼풀일까. 목 옆에 자리한 초라한 쥐젖일까. 아닐 거다. 이 모든 것은 그저 노화의 증거일 뿐이다. 나이가 들었기에 아버지가 맞을 거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애초에 전제가 잘못되었다. 내 동갑내기 친구 중에도 자녀가 없는 경우가 많다. 비혼이나 딩크가 이렇게나 많은데 나이에 따라서 아버지라고 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네 아버지들은 구분하기 쉬웠다. 겨드랑이에 전혀 신경 안 쓰는 난닝구 차림에 반바지. 제멋대로 자란 수염. 아무렇게나 접혀버린 운동화의 뒤축. 저녁 무렵에 힘든 몸을 이끌고 언덕을 오를 때, 술이 거나하게 취해 골목에서 크게 노래 부를 때, 이미 늦은 시간이지만 아이들을 위한 통닭을 황토색 봉투에 담아 나올 때. 우리는 이들이 아버지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IMF 전의 옛적 얘기고, 지금은 그렇게 쉽게 구분이 안 간다고.
나는 그 아버님이라는 호칭이 좋았다.
얼굴을 보았던, 분위기를 보았던, 아우라를 보았던, 나를 한 아이의 보호자로 불러준 아버님이라는 호칭이 썩 기분이 좋았다. 아직도 아이 옷의 앞뒤를 구분 못하는 병아리 아빠인 내가 비로소 다음 단계로 레벨업한 기분이다. 병아리에서 영계정도? 그런다고 특별히 달라지는 건 없지만 말이다.
그냥 그럴 때가 있다. 정답이 없는 육아라는 필드에서 매번 맵이 바뀌고 몹이 바뀌는 게임을 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곳에서 분투를 하고 있노라면 내가 가는 이 방향이 맞는가 싶고, 플레이어의 순위를 매기면 나는 하위권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아이템을 모으고 경험치는 쌓이는데 레벨은 안 오르고, 공략집은 많이 있는데 정작 내가 활용할 내용은 많이 없다. 이러면서 자신감이 갑자기 바닥을 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나여서 아버님이라는 호칭이 신나고 두근거리지 않았을까. 아이를 기르면서 신나고 유쾌한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건 색다른 경험이었다. 다음에 가도 아버님이라고 불러주려나?
그렇게 상기된 표정으로 집에 돌아가 아내에게 신나게 자랑했다. 나 아버님이라고 불렸어. 아내의 즉답은 이렇다.
난 싫어.
어머님이라고 불리기 싫다는 거다. 아내 또래의 모든 어머니가 그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