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착인형은 꼭 필요할까
영화나 드라마에서 아이들이(특히 여자 아이들이) 자다가 눈 비비면서 '엄마'하고 말하며 거실에 나타나면 꼭 한 손에 인형이 들려 있다. 그것을 애착인형이라고 부른다. 애착인형이란 무엇인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속싸개를 벗어던지고 두 팔이 자유로울 무렵, 그 자유롭게 노는 두 팔 안에 살포시 안겨주게 되는 인형이다. 이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어떤 기대와 목적으로 엄마는 그들에게 한자리를 내어주는가.
애착인형 '별이'를 소개합니다.
언제인지 정확지 않아서 사진을 뒤져보니, 아이가 9개월 즈음 사진 끄트머리에 보인다. 귀가 엉덩이까지 늘어진 무심한 표정의 짙은 남색 토끼 인형. 브랜드는 젤리캣. 엄마들의 커뮤니티에서 그렇게 인기가 높은 만큼 '비싸다'. 모른다, 왜 그렇게 비싼지 모르겠다. 아내가 샀다길래, 아 그렇구나 했을 뿐이다.
"네 친구 별이." 라며, 엄마는 아이에게 인형을 안겨준다. 당시 아이는 그게 친구일지 원수일지 무기물인지 생물인지 모른 채로 받아 들었다. 내 의심과는 반대로, 아이는 인형을 꼭 껴안고 잠들었다. 날이 갈수록, 아이는 '별이'없이 잠들기 힘들게 되었다. 애착도가 높아짐에 따라 나의 의심은 더욱 깊어진다. 이게 마케팅의 힘일까? 아니면 상품의 힘일까? 아무 인형이나 다 애착인형 되는 건 아닐까? 지겨운 이성주의 남자.
이름 붙인다고 다 애착은 아니더라.
'별이'보다 10배는 더 크고 훨씬 더 비싼 곰인형을 선물로 받았다. 북극에서 바로 온 것 같은 웅장함과 푹신함에 나 역시 매료되었다. 아이 엄마는 애착 밤하늘 시리즈물을 기획하기로 했나 보다.
"네 친구 달이야."라고 소개하며 연신 아이보다 큰 곰인형을 가리켰다. 한껏 기뻐하며 곰인형에 포옥 안겨 깔깔거리며 하는 말이 "곰도이(곰돌이)." 이름 붙인다고 다 애착이 되는 건 아닌가 보다. 한때 달이라는 이름을 가지려고 했던 곰돌이 인형은 방안 구석에 앉아서 인테리어 소품이 되었다.
별이야 어딨니?
아빠, 엄마, 다음은 별이다. 내 기억은 그렇다. 아빠를 제일 처음 발음하고 그다음은 엄마, 별이가 그 뒤를 따른다. 애착인형 별이는 무기물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외출할 때 별이 별이. 밥 먹을 때 별이 별이. 씻을 때 별이 별이. 어린이집 갈 때 별이 별이. 항상 찾게 되는데,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찾을 때가 잘 때이다. 이를 닦고, 책을 읽고 불을 끈다. 한참 뒤에 외치는 소리.
"별이야 어딨니?"
다시 불을 켜고 별이를 찾는다. 십중팔구 거실 어딘가에 누워 있다. 소중하게 껴안고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온다. 이제 소등 전에 별이의 행방을 쫓는 건 나의 임무가 되었다.
별이는 힘들다.
밥풀이 붙었다 떨어져 털이 빠지기도 하고, 국물 속에 한쪽 귀를 빠뜨려 폴리에스테르 육수를 내기도 하며, 겨울비에 처량하게 젖기도 한다. 눈밭에 구르고 뙤약볕에 모근이 타오른다. 점점 초췌해지는 별이를 보며 미안한 감정보다 언제까지 저 인형이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세탁하기도 쉽지 않다. 아이가 다른 곳에 정신이 꽂힌 사이 수건과 함께 돌돌 말아서 세탁 수조 안으로 투입한다. 건조 시간까지 포함하면 약 네다섯 시간. 이 공백이 두렵다.
"별이야 어딨니?" 어김없이 찾아오는 호출. 엄마는 애써 놀란 마음을 누르며, "별이는 지금 목욕 중이야, 별이가 너어어무 더러워서, 아유 냄새나! 그래서 금방 씻고 올 거야~"
너희들을 위한 거란다. 둘의 사랑을 위해서 떨어뜨려놓을 수밖에 없었어. 다섯 시간이야. 기다려줘. 깨끗한 모습으로 돌아올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한스럽게 울지 마.
어차피 기성품이다.
전국, 아니 전 세계에 수십만 개 똑같은 인형이 아이들의 품속에서 애착을 쌓고 있다. 키즈카페나 어린이집에 별이를 데리고 가면, 다른 아이가 붙어서 달라고 우는 경우가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물론 있다. 그래서 공공장소에는 별이를 데리고 가지 않아야 한다. 아이들의 애착 인형 쟁탈전을 보기 싫으면 말이다.
지금 별이에게 공장에서 출고된 생생한 모습은 털 한올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똑같은 브랜드의 똑같은 색상의 똑같은 토끼인형을 사서 안겨주면, 2년간 같이 지낸 애착 인형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까? 혹시 알아챈다고 하면, 기존의 애착인형 별이를 계속 고집할까? 어떤 결과라도 나는 괜히 만족 못할 것 같다. 못 알아챈다고 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낭만적이지 못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