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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는 사진이다.

남는 건 사진이다. 그건 사실이야.

by 붕어빵

"한대리님 지난 전시회에서 찍은 상품 사진 좀 보내주세요."

한대리가 고작 10장 남짓의 사진을 30분이 넘도록 보내질 않고 있다. 이게 처음이 아니다. 사진을 요청하면 한참 뒤에야 보내는 데, 잘못된 사진을 보내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궁금해져서 그녀의 아이폰을 들여다보니, 카메라롤을 넘기고 넘겨도 전부 아이 사진이다. 출산 후 15개월 만에 출근한 엄마의 아이폰 카메라롤에서 아이 사진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는 한참의 노력이 필요했다. 똑같은 사진이 너무 많아서(실제로는 살짝 다른) 내가 지금 사진을 찾는 건지 틀린 그림 찾기를 하는 건지 빙빙 돌기도 한다. 아이가 너무 이뻐 그 모습을 일일이 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저 많은 사진을 보기는 할까? 너무 사진이 많은데?


그게 지금 나다.


갤럭시 S22. 아내와 나의 선택이다. 우리는 객관적이고 계획적이었다. DSLR 같은 카메라만을 위한 카메라는 우리가 잘 가지고 다니지 않을뿐더러, 순간 포착력이 떨어진다. 언제 전원 올리고, 조준하고, 촬영할까. 그래서 휴대폰을 바꿨다. 본래 가지고 있던 아이폰 SE 2nd generation은 화소가 떨어지고, 용량이 떨어진다. 가장 큰 문제로, 사진 폴더 관리가 안된다. 한대리의 카메라롤과 같은 사태는 싫었다. 폴더별로 나누고 싶었다. 무엇보다, 같은 카메라 성능과 용량의 아이폰은 갤럭시보다 30,40만 원 비쌌다. 우리는 객관적이고 계획적이며 자금이 부족했다.


신생아에서 첫돌까지 촬영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피사체가 거의 누워있거나 기어다니는 정도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뒤뚱뒤뚱 걷기 때문에 행동반경이 2m를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슷한 사진이 많아서 조금씩 골라내면 컬렉션을 채울만한 퀄리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걷기 시작하면서 촬영은 액티브해진다. 영상 촬영 빈도가 늘어난다. 이때부터 유튜브 쇼츠급 연출이 가능하다. 아빠에게 아장아장 걸어가 안기는 아이. 숟가락 가득 밥을 먹고 기뻐하는 아이. 아빠하고 발음하는 입술. 서럽게 울면서 방울을 터트리는 콧구멍. 놀이터에서 미끄럼 타기, 시소 타기, 비눗방울 따라가기 등 놀이터 시리즈는 이때 가장 큰 인기를 끈다.

달리기 시작하면 다이내믹해진다. 뛰는 것을 쫓느라 카메라는 연신 출렁이고, 이미 셔터 찬스가 지난 후의 아쉬움도 많다. 체력 문제로 달리면서 작아지는 피사체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누굴 탓할 필요도 없이 내 탓이다. 이때 영상 속 음성은 헐떡이는 내 숨소리밖에 없다.

피사체는 내 맘 같지 않다. 춤을 추는 것을 촬영하려 급하게 휴대폰을 들이밀면 이미 공연은 끝난 뒤이다. 힘차게 앙코르를 외치고 한번 더 해달라고 조르지만, 파파라치의 카메라를 본 할리우드 여배우마냥 고개를 돌려버린다. 이제는 연출이 끼어들 틈이 없다. 다큐멘터리다.



그렇게 쌓이고 쌓여, 동영상 포함해서 12,710개. 31개월이다. 용량도 97% 찼다. 사진을 선별하고도 이만큼인데, 아니 벌써?라는 느낌이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아빠의 셔터 포인트는 점점 늘어만 간다. 이것도 찍고 싶고 저것도 찍고 싶고 이 율동을 영상으로 남기지 않으면 미래의 내가 울 것 같고, 이 어여쁜 모습을 디지털화하지 않으면 아쉬움이 남을 것 같다. 피사체인 내 딸은 그만큼 매일이 다르다.


그렇게 많이 저장해 놓으면, 나중에 보기나 해?

봐. 진짜 봐. 적어도 나는 봐. 첫 만남의 울먹이고 있는 내 목소리부터 두 돌 때 촛불 끄는 모습과 가장 최근의 노래 부르는 영상까지 그날그날의 선택에 맞춰 보고 또 본다. 그래도 질리지가 않는 것은 내가 피사체의 빅팬(Big Fan)이기 때문이다. 최애 아이돌의 영상은 보고 또 보잖아? 그것과 비슷한 것 아닐까. 즐겨찾기 기능을 활용해서 가장 좋아하는 영상과 사진도 지정해 뒀다. 특히나 회사에서 일하기 싫을 때, 피로하거나 의욕이 없을 때, 한 번씩 정주행 해주면 박카스보다 훨씬 효과가 좋다.

이것은 한 종류의 드라마가 된다. 시즌별로 묶어서 보관하면, 내 아이가 벌써 이만큼 컸나 싶다. 정신이 없이 육아에 매진한 만큼, 시간은 날아가고 추억은 증발한다. 일정 시기마다 한 번씩 봐주면 기억이 재생되고, 그날의 감정과 생각이 떠오른다. 재미와 몰입도에서는 넷플릭스 뺨친다. 내 이야기인데 당연하지.


나의 최애는 그렇게 나의 휴대폰을 가득 채웠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점령했다. 이만큼의 기록물이 쌓일 줄은 예상치 못한 거다. 이제 나는 어떤 추가 저장소가 접속 편의성이 좋을지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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