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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월 그녀의 언어생활

딸아이는 아빠를 닮아서 말을 잘한다.

by 붕어빵

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점이 뭘까? 언어다. 동물도 의사소통의 수단을 가지고 있고 표현할 줄 알지만, 인간의 그것은 차원이 다른 개념이다. 말을 할 줄 알고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다. 나의 딸아이가 그런 축복을 보여주기까지 애가 타고 간이 녹아서 반토막이 될 뻔한 것이 나다.

12개월, 돌이 지날 무렵. 아빠, 엄마라는 최초 대명사는 나의 아이는 물론 다른 아이들도 시작했다. 뭔지 알아듣지 못할 안드로메다 언어를 구하시기 시작한다. 이것만으로도 심장에 피가 너무 몰려서 건강에 해로울 지경이다.

20개월. 무리 중에서 유독 언어에 일찍 눈을 뜨는 아이들이 있다. 그 아이들은 단어가 아닌 문장을 엮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다른 엄마 아빠들이 부러움을 쌓아 올리게 한다. 이러한 부러움은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를 입밖에 내지는 못했다.

"A딸 S는 벌써 문장으로 말하기 시작해서, 엄마한테 손으로 음식 집어먹지 말라고 얘기한데." 아이 엄마는 부러움을 입 밖으로 낸다.


26개월. 사람의 언어가 시작된다.

잘 자. 안아줘. 맛있어. 아직 주어가 없는 모양새지만, 제법 동요도 따라 부르려 노력하고. 딸기, 포도, 수박 등 좋아하는 과일의 이름을 말하기 시작했다. '혹시 우리 딸 천재인가?'라는 팔불출 아빠의 모습은 없었다. 그저 그 짧은 단어의 나열이라도 감격스러워 휴대폰 동영상 기능을 들이밀기 바빴다. 두 돌 선물을 전달했을 때, 이게 뭐지?라고 물었다.

"타요!"라고 활짝 웃으며 소리치는 딸의 모습이 담긴 이 영상은 내가 관짝에 들어갈 때까지 보물이 될 것이다.


안돼! 하지 마! 가!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가장 많이 하는 말 3종 세트. 안돼! 하지 마! 가! 어디서 이런 말을 익힌 거야?라고 생각해 보면 그저 엄마 아빠의 영향이려니 싶다. 안돼! 그거 위험해 안돼! 하지 마! 물컵 던지는 거 아니야 하지 마! 이런 식으로 엄마 아빠가 가장 많이 한 말이 아닐까? 그런데 '가'는 뭐야? 손가락 다섯 개를 활짝 펼치며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손바닥을 밀며 하는 말, 가! 이건 어린이집 친구들의 영향인 것 같다. 뜻을 알고 있는 건가 싶어서 시험해 봤다. 가! 하고 손바닥으로 미는 시늉을 하며 똑같이 따라 하니, 반응이 아주 눈물의 여왕이다. 입꼬리를 잔뜩 내리고 슬픈 눈으로 원망스럽게 아빠를 바라보며 두 손을 맞잡고 꼼지락 댄다. 발그레하고 통통한 양볼에 눈물을 흘려보내며 터덜 터덜 엄마에게 간다. 아빠는 억울해. 너는 해도 되고, 나는 하면 안 되는 거니? 가지 말고 돌아와.


28개월. 애타게 기다리던 그날이 왔다.

"한번 입이 터지면 급속도로 성장한데." 아내의 말. 그 말은 사실이었다. 문장으로 말하기 시작한 그녀는 하루하루 다르게 달변이 되어 가고 있었다.

어느 날 "아빠 일어나."

그다음 날 "맛있어. 아빠도 줄까?"

그다음 날 "아빠 이리 와. 빨리 와. 여기 앉아."

그다음 날 "아기상어, (산타) 할아버지가 주셨어."

이렇게 성장하다가 학교 가기 전에 양자역학의 원리를 설명해 주지 않을까.


30개월. 내 딸이 맞니?

아이가 제 성질에 못 이겨 TV 리모컨을 던진 일이 있었다. 이럴 때는 따끔하게 훈육을 해야 하는 법. '던지면 안 되지! 어서 주워!' 못 알아듣는 척하는 딸을 향해 두세 번 더 리모컨을 주우라고 얘기했을 때,

"알았어요. 주울게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뭘 들은 거지? 잘못 들었나 싶어 아내를 보니 눈이 1.5배 커져있다. 이후로 똑같은 말은 들어볼 수 없었다. 나는 일본 라이트노벨에서만 볼 수 있었던 그런 제목을 떠올렸다.

'천재인 내가 사고를 당하고 다시 태어나니 대한민국 직장인 딸인 건에 관하여'

내 딸이 맞니? 혹시 지금 2회차세요?


말을 하기 시작하면, 육아가 즐겁다.

놀이가 다채로워진다. 아이스크림 가게나 마트 쇼핑 역할극을 주고받으며 점원과 손님이 될 수도 있고, 책을 읽으며 여러 가지 감정을 얘기할 수 있다. 병원 놀이를 하면 아빠는 꼭 누워야 한다. 뭔가를 먹으면 맛있다고 표현하고, 고맙다고 표현한다.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이 이 속에 있다.


말을 하기 시작하면, 육아가 힘들다.

싫다는 건 왜 이리 많아. 반응을 해줄 때까지 똑같은 얘기를 반복하고, 자신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못 들은 척하고, 원하는 것을 줄 때까지 발을 동동 구르며 징징거린다. "오트밀 싫어! 빵! 빵! 빵 줘!"

자려고 누웠을 때, 응가했다고 해서 불 켜고 확인하면,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이미 여러 번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 마! 불편해!

놀랍다. 한 번이 아니고 자주 하는 입버릇이다. 발음도 점점 또렷해지고 있다. 알고 보니 어린이집의 절친이 자주 하는 말인데, 그 절친의 엄마가 알려준 말이라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절친의 평상시 말투가 딸아이와 똑 닮았다.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내 아이의 언어가 내가 모르는 새, 내가 모르는 곳에서 발전하고 있었다. 뭔가 큰 비밀을 깨친 느낌.




한 때는 말 잘하는 아이가 부러웠지만, 이제는 부러움을 받고 있다.

"이렇게 발음이 정확하다고?"

"몇 개월인데 이렇게 말을 잘해?"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아빠 닮아서'라고 말하기 쑥스러워서 그냥 웃고 만다. 나는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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