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할 때, 남자들이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좋은 날은 다 갔다."
그 좋은 날을 조금이라도 지키기 위한 조언이 뒤따라 이어진다. 무조건 미안하다고 해. 집안일은 못하는 척 해. 혼자 할 수 있는 취미를 만들어. 네 방을 가져야 해. 무엇보다 네 통장은 네가 관리해야 해. 한국사 교과서처럼 다 들어본 이야기다. 이 많은 조언 중에 무엇하나 따른 것이 없지만, 소중한 조언이라고 건넨 그들의 마음도 이해한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날의 정의는 뭘까. 음주, 게임, 낚시, 바이크도 있을 수 있고 프라모델, RC카, 동호회 등 이 모든 것을 '자유롭게' 향유하는 날들을 좋은 날이라 지칭하는 것이겠지. 나의 경우는 게임이다. 내가 번 돈으로 게임사고, 하고 싶을 때 플레이스테이션 돌리고, 밤에는 어슬렁어슬렁 슬리퍼 끌며 나가서 동네 친구랑 술 진탕 마시고 비틀비틀 아침 일찍 집에 들어가는 시나리오가 좋은 날이라면 좋은 날이었다.
결혼하면 이 모든 것에 빨간딱지가 붙는다. 피치 못할 사정을 많은 형용사를 붙여 작성한 기안서를 반려 없이 결제받아야 시행할 수 있다. 예산 첨부를 잊지 않아야 한다. 배우 최민수의 아내 강주은 씨는 이렇게 말했다.
"네 것도 내 것, 내 것도 내 것."
아내의 임신 소식을 친구들에게 알리면, 축하한다는 말 후에 애잔한 얼굴로 아빠들은 말한다.
"좋은 날은 다 갔다."
그 뒤에 조언은 없다. 그나마 남아 있던 좋은 날을 지키기 위한 방법은 그들도 찾지 못했다. 가상현실 접속을 위한 케이블을 잘라내고, 음주란 장례식장에서나 가능하며, 휴일(休日)이라는 한자어가 무색하게 쉬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진다. 심지어 수면 시간도 줄여야 한다.
결혼 전 좋은 날과 출산 전 좋은 날의 차이는 있다. 이제 아내와의 '좋은 날' 마저 빨간딱지가 붙는다. 둘이서 손잡고 영화를 보러 갈 수 없고, 식사 메뉴 선정에 제한이 생기며, 같이 TV를 보면서 맥주로 영혼을 달래는데 부담이 생긴다. 가장 심각한 것은 아내의 스트레스 게이지가 한계돌파 상태다.
가상현실의 캐릭터를 키우다가 현실의 인간을 키우게 되었다. 저장과 되돌리기가 없는 하루하루가 게임보다 스릴 넘친다. 끝판왕을 깨면 엔딩이 아닌, 무한 루틴으로 끝없이 즐길 수 있다. 매일이 끝판왕 같다. 내가 뭐 한 거 없는 것 같은데 어느새 성장해 있는 모습을 보면 신기하다. 이게 얼마나 재밌냐면, 지난 3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서 초반 기억이 벌써 흐릿하다. 성장에 대한 엄청난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오르다가도 작열하는 책임감에 오싹해지기도 한다.
술을 못 마셔도 괜찮다. 낚시는 나중에 같이 가지 뭐. 동호회 친구들과는 아이 동반으로 본다. 새벽에 일어나서 이어폰 착용하고 1시간씩 게임하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다. 회사에서 몰래 책을 보는 버릇이 생겼다. 접점이 없던 아내와 나의 취미에 정말 커다랗고 아름다운 최우선 공동 관심사가 생겼다.
좋은 날이 가고 다른 장르의 좋은 날이 왔다. 1명이었을 때의 좋은 날을 지나고 2명이었을 때의 좋은 날을 거쳐서, 3명의 좋은 날을 보내고 있다. 나는 분명 10년 뒤에 "그때가 좋았지." 라며 지금의 좋은 날을 추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