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나의 아내가 딸을 출산 했다. 아내는 엄마라는 이름을, 나는 아빠라는 이름을 부여받았고 이는 출생신고와 함께 법정 당위성을 갖는다.
40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애를 낳았다고 자동으로 아빠 되는 거 아니더라."
육아는 낭만과 현실을 1대 1로 섞은 스무디 같다. 맛있는데 비싸. 빨리 먹으면 머리 아파. 매트릭스에 나오는 빨간약과 파란약을 동시에 섭취하는 것 같다. 환상 속을 둥둥 떠다니다가 현실로 급격히 돌아온다. 이런 상황에서 환상과 낭만에 취해 아무것도 안 하면, '아빠'라는 이름의 중압감에 짓눌려버린다. 아빠가 되려면, 노력해야 한다.
건강해야 한다.
아이를 낳고 급격히 노쇠한 걸까? 아니면 그냥 시간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일까? 프로선수가 되자마자 급격히 폼이 떨어진 축구선수같은 기분이다. 간, 혈압, 당뇨 수치는 연일 신고가를 찍고 있고, 5번 디스크는 터지고, 대장에서 빅(Big) 용종과 선종을 잘라냈다. 45세의 아빠는 일단 할 수 있는 것부터 한다. 약을 잘 챙겨 먹고, 출퇴근은 자전거로 하고, 목욕하기 전에 팔굽혀 펴기. 제일 어려운 금연은 올해만 벌써 5번째 도전 중.
건강해야 한다. 적어도 많이 아프지는 말아야 한다. 딸이 웃고 있다. 아빠도 웃어야지.
많이 알아야 한다.
대학교까지 교육 잘 받았고, 책도 많이 읽고, 뉴스도 보면서, 신문도 구독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육아에 하등 쓸모없었다. 사회 초년생 마냥 흥분과 광기의 와중에 눈칫밥을 먹으며 산다. 뭐 아는 게 있어야 일을 하지. 분유 타는 법부터 대표님(아내)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며, 하지 말라는 것과 하라는 것을 꼼꼼히 메모하고, 그 와중에 알아서 센스 있게 잘해야 "그런 것도 못해?"라는 말을 피할 수 있다.
건강한 마음가짐을 장비해야 한다.
아빠가 갖추어야 할 기본 장비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건강한 마음가짐'이다.
"나는 이런 아빠가 되어야지." 하면서 몸에 맞지도 않는 이상형을 장착해 버리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뿐더러 자신만 다그치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혼난다. 나는 이즈음에 와서 이런 마음가짐을 장착하고 살고 있다. "이런 아빠만큼은 되지 말자."
멘탈을 잡는다.
순식간에 무너진다. 아빠는 나약하다. 하루하루가 다르다. 기분이 이쪽으로 튀었다가 저쪽으로 날아간다. 한 대 맞은 것 같다가도 위로받은 느낌이 된다. 휴대폰 사진을 보면서 웃다가 갑자기 눈물이 고인다. 설거지하다가 컵을 던지고 싶다. 그러다가 침대에 아이와 누우면 이 세상 다 끝날 정도로 행복하다. 이러다가 내가 끝나겠다. 이래서 금연을 네 번 실패했다. 뭔가 해야 한다.
육아가 아닌 나의 취미가 필요하다. 설거지를 하면서 유튜브를 보고, 잠들기 전 한 페이지라도 책을 본다. 한 달에 한 번씩 친구들을 만난다. 밤에 일찍 자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게임기를 켠다. 회사 점심시간에 넷플릭스를 본다. 도저히 안될 때는, 내가 지금 많이 힘들다고 아내에게 도움을 구한다.
아빠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저기 작은 생명이 오롯이 나를 의지한다. 그녀 세상의 반이 나다. 그렇게 의지할 사람이 되는 건 쉬운데, 유지하기가 어렵다. 딸이 성인이 되면, 나는 이미 60대. 길게 길게 가자. 욕심을 버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한다. 존경할만한 아빠가 될 수 없다면, 부끄러운 아빠가 되지 말자고 다시 생각을 부여잡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