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시에서 세종시까지
[도보 1일 차]
'부부 우웅----'
군 제대 후 한 달 정도 지난 무렵, 새벽 공기를 가르며 버스가 출발했다. 서울 터미널을 떠나 목포를 향해 장시간 달려야 하는 버스였다. 나는 그 버스 안에 타고 있었다. 같이 걷게 될 두 명의 동기 형제들과 함께였다.
내 마음은 조금은 떨리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목포 터미널에 도착해서 출발점에 섰다.
출발지는 성 미카엘 성당이었다.
얼굴에 스치는 1월의 새벽 공기는 매우 차가웠다. 도보 순례는 6일 동안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6일 동안 걸을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 도보순례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겪으면서도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며 기도 안에서 어려움을 이겨내는 연습을 하기 위한 수도원의 프로그램이다. 일주일 가까이 걷는 것도 쉽지 않은데, 돈도 가져가지 않았고, 잠을 잘 숙소도 예약하지 않았다. 정말 '몸'만 가는 무전 도보 순례인 것이었다. 앞으로 6일 동안 무슨 일이 펼쳐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오로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성 미카엘 성당 앞에서 성호를 긋고 출발했다.
6일 동안 400km를 걸어야 한다는 건 하루에 적어도 60km은 걸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함께 걷는 형제들과 상의해서 매일 꾸준히 잘 걸어보자고 다짐했다. 시작은 좋았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우선 나주시 방향으로 걸었다. 침묵 속에서 걸었기 때문에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겪었던 일들, 앞으로 맞이할 일들에 대한 사색으로 가득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어 배가 고파왔다. 돈이 없는 관계로 식사는 매번 구걸을 해야 했다. 제일 먼저 갔던 찾아간 곳은 일반 가정집이었다. 한 겨울에 젊은 남자 셋이서 도보를 하면서 밥을 청하는 모습이 어때 보였을까? 문득 점점 개인주의적인 풍토가 만연해지는 오늘날, 사람들 눈에 이상하게 보일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매번 아주 조심스레 부탁을 드렸다. 네 집 정도 들렸을까...? 우리 세 명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다섯 번째 집에 들르고 나서야 사과 여섯 개를 얻어먹을 수 있었다. 밥이 아니라서 미안하다며 챙겨주신 과일이 얼마나 소중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다행히 첫날이라서 체력이 있었고, 사과 여섯 개를 각자 두 개씩 나누어 먹으며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었다. 엄청 달콤했다. 사과로 저녁식사를 하고, 우리는 이어서 걸었다. 원래 밤 시간 전에 머물 동네를 정하고, 어두워지기 전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첫날은 그냥 계속 걷기로 했다. 에너지가 있을 때, 쭉쭉 진도를 나가야 한다는 한 형제의 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첫날의 자정을 지나 둘째 날 새벽, 아침까지 걸었다.
[도보 2일 차]
'툭... 툭... 투두둑... 투둑... 투두두두두두두두두두......'
비가 내렸다.
출발 전 일기예보에 의하면, 새벽에 눈이 내릴 확률이 30% 정도라고 했다. 그런데 눈이 아닌 비가 내렸다. 굵은 빗줄기가 추위를 견디기 위해 껴입은 여러 겹의 옷을 적셨다. 바람막이, 티셔츠, 등산바지, 양말, 신발이 젖어갔다. 다행히 시골마을 한편에 작은 조명이 있는 버스정류장을 발견했다. 그 좁은 정류장을 비집고 들어가 셋이서 각자 나름의 준비를 했다.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고 갈아입을 수 있는 옷은 갈아입었다. 양말과 신발을 더 젖지 않게 하기 위해서 노란 박스테이프를 무릎부터 발바닥까지 칭칭 감아 붙였다. 세 명이서 무릎부터 발까지 전부 노란 닭발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다가 다시 출발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빗소리는 점점 더 거세졌고, 우리의 닭발 사이를 뚫고 빗물들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 앞에는 깜깜한 시골 언덕길 뿐이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아침 동이 틀 무렵, 비구름에 가려진 태양은 희미했고 비는 서서히 그치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는 나주시에 도착했다. 젖은 양말, 신발과 함께..
오전 10시경이 되자, 꽤 큰 규모의 마을이 보였다. 첫날에는 사과만으로 끼니를 때울 수 있었지만, 새벽에 빗속에서 추위를 견디며 걸어서 배가 엄청 고팠다. 이번에는 가정집에 부탁을 드리지 않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다. 마을 언저리에 작은 소방서가 보였다. 소방서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고 인기척이 들려서 그곳에 조심스레 들렸다. 희한하다는 눈으로 보던 한 소방관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 네,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저희는 도보 여행 중인 청년들인데요..."
나는 우리의 상황을 말씀드리고 정중히 끼니를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는지 여쭈어 보았다. 소방관님들은 방금 이른 점심을 먹었다고 안타까워하셨다. 그러다가 한 분이 기다려 보라며 어디론가 가셨다. 그분이 몇 분뒤 가지고 온 것은 라면 다섯 봉지였다.
"이거라도 드세요. 고생이 많으시네요 추운 날에..."
"감사합니다!"
라면 다섯 봉지라니... 너무 기뻤다. 이렇게 우리의 둘째 날 점심은 라면으로 결정되었다. 라면을 어떻게 먹을까 고민하던 찰나, 갑자기 한 형제가 맨바닥에 풀썩 앉았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아... 나.. 다리가 좀 아픈데..."
그 형제는 무릎을 감싸 쥐더니 어젯밤에 너무 무리해서 걸은 것 같다고 했다. 우리는 아직 5일씩이나 더 걸어야 했다. 벌써 아프다고 쓰러지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일단, 우리는 라면 다섯 봉지를 들고 쉴 곳을 찾기 시작했다. 맞은편에 큰 노인정이 보였다. 거기서 쉬기로 하고 노인정으로 들어갔다. 노인정에 들어가니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 분들이 계셨고 우리를 신기하게 보셨다. 이어서 한 할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아니, 도보 여행 중인 청년이라니, 내일모레가 설날인데 어떻게 부모 가족 버리고 친구들끼리 나와서 여행을 할 수가 있어? 자식 된 도리를 다 버린 거야 뭐야?!"
우리는 당황스러웠다. 우리의 상황을 설명드렸지만 할아버지는 다 이해하지 못하셨다. 한편으로는 할아버지의 반응이 납득도 갔다. 수도자, 사제가 되기 위해서 집을 나와 수도원에 살면서 설날 전날에 도보 순례를 하는 우리 모습이 이상하게 보일 만하다고 생각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분들께 허락을 받고 노인정 한편의 방을 빌리고, 주방을 이용할 수 있었다. 다리가 아픈 형제를 먼저 쉬게 하고, 나는 주방에서 소방서에서 받은 라면 다섯 개를 끓였다. 맛있게 나누어 먹고 나니 차갑게 얼었던 몸이 녹으면서 나른 해졌다. 그렇게 우리는 세 시간을 쉬고 다시 출발했다. 광주를 지나, 장성군-고창군-정읍시-전주시-완주군-익산시-공주시-세종시로 이어지는 여정이 우리 앞에 남아 있었다.
이 글을 빌어 여행 중 만났던 모든 분들 특히 과일을 나누어 주신 가족 분들, 소방관 분들 그리고 노인정의 할머니 할아버지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