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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사 Aug 14. 2024

[어린 시절(5)] 가족 여행

동유럽 성지순례

"자 일어나 가자. 시간 됐어".

아빠가 지그시 웃으시며 나를 슬며시 깨웠다.


아빠의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잠에서 깼고 거실에서 잠들었던 누나는 일어난 지 몇 분 안 되어 보였다.

현관문은 환히 열려있고, 문 밖에서 시동 걸린 우리 차 소리가 들려왔다.

화장실에서 나오시는 엄마는 화장을 다 마친 상태였다.

기억나지 않는 여러 편의 꿈을 꾸었던 나는 허둥지둥 오늘이 가족 여행 날이라는 걸 깨닫고 부스럭부스럭 이불을 걷어내고 세수를 한다.

15분 정도가 지나고 누나와 나는 외출 준비를 마쳤다.

현관문 밖으로 나오자, 아빠 트렁크에는 어젯밤에 함께 준비했던 캐리어 4개가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엄마, 아빠의 부지런함을 감탄할 사이도 없이 차는 서둘러 인천공항을 향해 출발했다.


2005년 7월 말, 여름이 한창일 우리 가족은 이렇게 여행을 떠났다.

여행의 도착지는 동유럽 5개국, 기간은 3주였다.

난생처음 가보는 '해외여행'이었다. 그 흔한 서유럽이 아닌 동유럽으로의 여행이었다.

폴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라는 개인적으로 다소 생소한 곳으로 갔다.

오늘날처럼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의 SNS가 없던 시절이라 각 나라마다 꼭 가야 하는 포토존이 어딘지, 맛집이 어딘지 잘 알지는 못했지만, 아쉬워할 이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가톨릭 성지 순례'의 목적으로 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이 8대 가톨릭 집안이어서 모두가 동의한 여행 일정이었다. 당시 나는 14살이었기에 사춘기가 시작되던 때였고, 누나는 17살로 사춘기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두 아이들의 사춘기로 인해 가족 내에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지만, 우리 가족은 이 여행으로나마 서로 일치하는 마음을 갖길 바랐다.


인천공항 출국 시간은 오전 11시경이었다. 부산 근처에서 살고 있던 우리 가족은 이른 새벽 고속도로를 달려 9시에 딱 맞춰 공항에 도착했다. 탑승수속을 시작하기 전에 30여 명이 되는 그룹 인원 체크를 했다. 패키지여행이라 속한 그룹에 잘 붙어 다녀야 했고, 시간도 엄수해야 했다. 지금이야 '패키지여행'하면, 덜 자유롭다는 생각을 하기 쉽지만, 당시의 나는 해외로의 여행이 처음이고 말이 안 통한다는 점이 무서워서 패키지여행이 안전하다고 느껴졌다.


생애 첫 탑승수속을 마치고 탑승구로 가는 길. 우리 그룹에 속한 다른 낯선 사람들을 보니, 갑자기 우리 가족과 더 붙어있고 싫어졌다. 탑승구로 가는 길이 왜 이렇게 먼 지... 나는 세상에 명품들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 온갖 향수, 술, 시계, 담배, 기념품 등등의 화려한 매장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무사히 비행기에 탔다. 초등학교 시절 제주도에 간다고 탔던 국내선 비행기 이후에 탄 첫 비행기인데 더 크게 느껴졌다. 이륙할 때는 무서운 듯 짜릿했고, 이내 곧 기내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살살 추워지며 잠이 들었고, 기내식도 중간에 두 번 먹었다. 화장실에 다녀오며 힐끗 내려다본 창문 밖 하늘 아래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시베리아 상공 쪽을 지날 때는 눈 덮인 산과 들이 절경이었고, 구름의 흰 빛과 하늘의 푸른빛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시베리아 근처 상공을 지나며


폴란드 바르샤바 공항에 도착하기 전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을 경유했다. 경유하는 4시간 동안 잠깐 나와서 네덜란드 풍차를 보며 어떤 강가에서 유람선을 탔다. 성지 순례인데 일반 관광처럼 즐기기도 해서 개인적으로 다소 놀랐다. 공항에 복귀하여 비행기를 갈아타고 드디어 첫 번째 목적지인 바르샤바 쇼팽 공항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호텔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바로 잠이 들었다.

그렇게 총합 25시간('부산-인천공항 차량 6시간'+'인천-네덜란드 비행기 13시간'+'네덜란드 경유 대기 4시간'+'네덜란드-바르샤바 비행기 2시간)의 첫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둘째 날부터 본격적인 성지순례가 시작되었다. 바르샤바의 주교좌성당을 돌며 미사를 드리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고향인 '바도비체'에 들리고, '크라쿠프'라는 남부 도시를 순례했다. 그리고 셋째 날에는 세계사 수업시간에만 듣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갔다. 들어가는 순간부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학살은 이미 예전에 벌어진 곳이었지만, 장소가 주는 분위기는 아직도 살아 숨 쉬는 듯했다. 얇은 유리벽 뒤로 산처럼 쌓여있는 희생자들의 머리카락... 슬리퍼들... 가스실 벽에 남아있는 손톱자국들... 아유슈비츠에 갔던 날은 희생자분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던 기억이 난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 모습


이틀에 걸친 폴란드 순례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체코로 향했다. 가이드 아저씨는 피곤하실 테니 자라고 하는데 나는 창밖에 비친 아기자기하고 예쁜 체코의 주택 집들을 바라보느라 잠들 수 없었다. 당시 사진사셨던 아빠는 정성껏 챙겨 온 비디오카메라로 풍경들을 열심히 담으셨다. 아빠가 추억으로 남기고자 누나와 나를 찍고 싶어 하셨는데, 누나와 나는 사춘기 때문에 민감하여 사진과 비디오에 담기는 걸 질색했다. 이 때문에 즐거운 여행 중에 잔잔한 말다툼이 오고 갔다. 훗날 크고 보니, 가족 여행 때 아빠 뜻대로 사진과 비디오를 많이 찍어 놓는 게 좋았던 것 같다. 후회가 되는 부분이다. 지금은 아빠의 마음을 이해한다.


프라하에 도착했다.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는 나에게 중요한 성지였다. 내가 좋아하는 기도문의 발상지였기 때문이다. '프라하의 아기 예수'라는 기도문인데, '아기 예수 성당'에서 아기 예수 상의 원본도 보고 미사도 드리고 복사(미사 중에 신부님 옆에서 도움을 드리는 역할)도 서면서 너무나 기쁜 경험을 했다. 프라하에서의 경험은 나의 사제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더욱 굳건하게 해 주었다. 유럽의 다양한 음식도 맛보고 풍경 구경도 했지만, 나에게는 성지에 방문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게 다가왔다.

프라하의 아기 예수 상


아름다운 오스트리아와 크로아티아도 방문하고 난 뒤, 2주 간 머무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라는 나라에 도착했다. 이 나라에 있는 '메주고리예'라는 성지를 방문하기 위해서다. 이곳이 메인 성지였다. 2주간 머물 예정이고, 가톨릭 세계 청년 축제 기간이라 전 세계의 가톨릭 청년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 이름도 생소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2005년 당시 내전 중이었다. 버스 안 모든 인원이 국경에서 여권을 보여주고 신원확인을 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나가는 마을들 마다 총알 박힌 벽들이 보였고, 가이드 아저씨도 계속 긴장을 하고 지내셔야 한다고 말했다. 가족 여행이 비극이 되면 안 되기에 나는 메주고리예에서 지낸 2주 동안 열심히 기도했다.


메주고리예 성지 성당(왼쪽 쌍둥이 종탑) 뒤 광장 모습


하느님께서 기도를 잘 들어주셨다.

2주 동안 아무런 사고 없이 크고 작은 경험들로 많은 선물을 주셨다. 내 나이 또래의 외국인 친구들도 만나고, 믿음이란, 사랑이란 무엇인지 나눔도 하고... 어떤 친구들은 성시간(예수님의 성체를 중앙 제대에 모셔놓고 침묵 속에 성체를 바라보며 집중하는 기도) 중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는 당시에 기도를 하면서 내가 바라는 것만 기도했지, 무언가를 깊게 느끼며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기에 그 친구들이 신기하기도 했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낯설었던 같은 그룹의 사람들도 하루하루 같이 다니고 식사하면서 친근한 마음이 들었다. 여행 시작한 지 하루 이틀 정도는 '이게 유럽의 맛이지'하면서 맛있게 유럽 식사를 하시던 아주머니들의 3일 차부터 정성스레 싸 오신 김치와 라면을 개봉하기 시작하는 모습, 사진 좀 찍자고 닦달하던 아빠와 엄마를 등지고 끝까지 투정 부리던 아이 같은 누나와 나의 모습, 여행을 모두 마치고 인천공항에 돌아와 같은 그룹이었던 분들과 헤어지는데 괜스레 아쉬워하던 나의 모습.


이 모든 모습들이 오늘에 와서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나의 첫 가족 해외여행. 어렸었기에 순수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던, 그래서 더 소중했던 기억이다. 추억이라는 선물을 주신 하느님과 우리 가족 모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글을 빌어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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