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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사 Aug 21. 2024

[어린 시절(6)] 나는 공부가 싫었다

'눈높이' 학습지의 추억

"띵동- 띵동-"

현관문 벨소리가 울리자

나는 자연스레 인터폰 화면을 보았다. 단정한 양복차림의 한 남자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오셨구나... 이번 주에도..."


그는 매주 한 번씩 우리 집에 오는 단골손님이었다. 부모님과 할머니는 그분이 오시면 달갑게 환대해 주시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겉으로는 웃으며 인사드리지만, 그분 앞에만 서면 긴장되고 시간이 빨리 흘러가길 바랄 뿐이었다.


나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결국 오늘도 오셨다. 사실 이 분은 바로 '수학 학습지 선생님'이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약 3년간 '눈높이'라는 학습지를 했다. 2000년대 초 당시에 거의 모든 반 친구들은 방과 후 학원을 다니는 게 당연하다시피 했고, 몇몇 애들은 '눈높이', '빨간펜', '구몬학습'과 같은 학습지를 곁들여 공부하기도 했다. 나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엄마의 설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내가 제일 못하는 수학 과목만을 학습지로 보충해서 더 공부하자고 제안했다. 내 주변 친구들 중에서는 수학뿐 아니라 영어와 과학도 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수학만 해보자'라는 엄마의 제안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느껴졌다. 내가 동의한 바로 다음날, 학습지 선생님이 나를 테스트하러 집에 방문하셨다. 첫 방문이었다.


선생님은 깔끔한 양복차림에 구두를 신고 미소 띤 얼굴로 들어오셔서 사근사근한 말투로 나를 대해주셨다. 낯을 가리는 성격이었던 나는 어색한 대답과 미소로 줄곧 답했다. 테스트를 마치고 내 수준에 해당하는 책이 정해졌다. 이 책으로 매일 할당량의 문제를 풀어야 했다. 매일 할 분량의 페이지 끝자락에 큰 별표를 그려주셨다. 선생님은 매주 수요일에 방문하셔서 내가 학습지를 매일 잘 풀고 있나 확인하실 거라 하시고, 틀린 문제나 질문이 있으면 매번 선생님께 물어보라고 하셨다. 이렇게 나의 첫 수학 학습지는 시작됐다.


사실 나는 학습지 외에 따로 다니는 학원이 하나 있었다. 공식적인 학원은 아니었고, 가정집에서 한 명의 선생님 아래 여러 아이들이 모여서 함께 공부하는 '단체 과외' 성격의 학원이었다. 동네 학부모님들의 입소문을 타고 수강생들이 늘어가던 이 학원은 완전 스파르타식이었다. 시험 치고 틀린 개수대로 손가락을 튕겨 뺨을 맞아야 했고, 선생님이 다른 학생들을 부추겨 성적이 좋지 못한 아이에게 듣기 불편한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수치심으로라도 계속 공부를 시키려는 학원 선생님의 전략인 것이었을까? 어쨌든 나의 시선으로는 이런 자극적인 스파르타 방식이 이해가 거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이 학원을 다니면서 꽤 많은 학생들의 성적이 올랐기에, 어른들 사이에서 이 학원의 평판은 역설적이게도 늘 좋았다. 나는 이 학원을 다니면서 인간적인 수치심도 느꼈고 공부에 대한 지루함도 느꼈다. 하지만 계속 다닐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원하고, 주변 사람들이 '공부는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나같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니던 학원에서 이미 숙제가 많았다. 수학 학습지를 시작한 지 두 달 가까이 되어갈 무렵, 결국 학습지는 나에게 짐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학습지를 밀리기 시작했다.


"여기 별표 친 데까지 문제 다 풀어놔야 돼. 알겠지? 다음 주에 보자. 안녕"


학습지 선생님의 멘트는 이렇게 매주 똑같았지만, 내 별표는 매주 쌓여가고 있었다. 한 달이 밀리고... 두 달이 밀렸다. 밀리는 양이 늘어갈수록 더욱더 손을 댈 수 없었다. 나는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한다는 스스로의 압박감, 부모님의 기대, 문제를 틀릴 때마다 장난치는 친구들의 모습들이 오히려 나의 공부에 발목을 잡는 것 같았다. 동시에 나는 이런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사람들은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성적이 좋지 않으면 무작정 혼이 났기 때문에 나의 그간의 노력도 없던 것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공부에 회의적인 느낌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에 공부가 싫었다. 학습지를 밀린 것도 나의 게으름과 더불어 공부가 하기 싫다는 내 안의 어린아이 같은 작은 반란이었다.


학습지를 제 때 하지 못하고 밀린 건 3개월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매주 "또 밀렸어? 어이구... 다음 주에 꼭 해 와"라고 타이르시던 선생님은 3개월째가 되자, 결국 분위기가 바뀌었다. 선생님은 결심한 듯 나에게 말했다.


"또 밀렸네. 음... 혹시 오늘 오후랑 저녁에 시간 되니?"


나는 어리둥절했다. 식사를 함께하자는 건 아닐 텐데. 나는 시간이 된다고 답했다. 그러자 선생님이 말했다.


"자. 잘 들어. 네가 세 달 동안 밀린 네 권의 책들. 오늘 저녁까지 다 마치고 나에게 검사받는다. 알겠어? "


나는 귀를 의심했다. 네 권의 책들을 어떻게 몇 시간 만에 풀 수 있단 말인가. 선생님은 나의 놀라는 표정을 보고도 굳은 표정으로 수고하란 말을 하셨다. 그리곤 내가 보는 앞에서 엄마와 통화를 했다. "아드님이 오늘 늦을 수도 있어요. 밀린 부분이 좀 있거든요". 나는 선생님과 함께 내 집을 나와 선생님 차에 탔다. 선생님은 나와의 수업 시간 후에 두 학생의 수업이 더 있었다. 선생님이 그 학생들의 집에 다녀오는 동안 나는 계속 차 안에서 밀린 학습지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너무 힘들었다. 수학이라서 꼼수를 써서 빨리 풀 수도 없었다. 답답했고, 학습지를 밀린 게 후회스러웠다. 선생님은 하루의 모든 수업을 마치셨고 시간은 저녁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 예상으로는, 저녁시간이 되면 "다음부터는 잘하자"하며, 다시 내 집에 바래다주실 줄 알았다. 그런데, 선생님은 집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셨다. 내가 도착한 곳은 '눈높이 부산지사 본사'였다. 선생님의 테이블 옆에 앉아서 계속 밀린 문제를 풀었다. 저녁으로 먹으라고 샌드위치를 주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곤 '정말 밀린 문제를 마치지 못하면 집에 못 가겠구나'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허겁지겁 샌드위치를 먹은 지 한 시간이 더 지났을 때, 시간은 이미 밤 8시가 넘어있었다. 나는 용케 도학습지 두 권째를 거의 끝내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나머지 두 권을 오늘 밤 내로 끝내는 건 역부족인 것 같았다. 그때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문제 풀만 하니?"


나는 조금 어렵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너무 많이 밀려서 죄송하다"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선생님은

"어려운 게 당연한 거야. 그러니까 배우는 거고 모르면 물어보는 거지. 죄송할 필요는 없어.. 단지 네가 꾸준히 성실하게 할 일을 했으면 좋겠어. 특별히 똑똑한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작은 걸 하더라도 성실한 게 가장 기본이고 중요한 거야. 네가 오늘 하루동안 어려움을 겪으면서 성실함의 중요성을 깨닫길 바랐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이 사건 이후로 학습지를 2년 더 했다. 매주 이 날의 일을 기억하며 밀리지 않으려 게으름과 싸웠다. 성실함은 돈처럼 한 손에 쥐어지는 것이 아니다. 순간의 의지와 꾸준한 노력으로 빚어내는 작지만 확실한 열매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능을 마치고 신학교에 들어가 생활할 때도 성실함은 나의 완벽하지 못한 지능을 대체해 주는 소중한 능력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외부의 압박 때문에 공부가 싫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공부를 찾아서 하고 싶어 한다. 관심 있는 분야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접하고, 배워가고 있다.


나의 어린 시절, 공부를 싫어하던 나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고자 했던 부모님, 학습지 선생님, 학교 선생님들 모두...

이 글을 빌어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나의 게으른 모습을 보는 듯한 '게으른 초코 아기곰' (프랑스 출국 전, 홍대의 한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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