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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사 Aug 28. 2024

[어린 시절(7)] 누나의 존재

"야, 업혀!"

나에겐 세 살 터울의 누나가 한 명 있다.

 

어린 시절 때, 누나는 나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기억되어 왔다.

어떤 때는 진지한 선생님 같고, 어떤 때는 철없는 친구도 되고, 또 어떤 때는 귀 기울여 내 말을 잘 들어주는 인생의 조언자가 되어주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누나는 어떤 사건에 대해서 부모님과는 다른 젊은 세대의 시각으로 해석해 주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만약에 누나가 없었고 나 혼자 이 세상을 살게 되었다면, '누나'라는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을 거라 생각해 본다. 초등학교 시절엔 나의 음악, 미술 숙제를 몰래 대신해 주던 음악 선생님, 미술 선생님이었고, 어른이 되어서는 가족 내 일들에 대하여 각자의 의견을 공유하고 나은 가족을 위해 부모님을 돕는 팀과도 같은 존재였다. 염치없지만, 누나가 워낙 금손이라서 누나가 대신해 준 미술 숙제는 특히 매번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래서인지 지금 직업도 마카롱을 맛있고 예쁘게 잘 만드는 파티시에(Pâtissière)다. 살이라는 나이 차이가 차이도 아닌데, 누나는 삶에서 나보다 여러 앞서 있었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오늘은 누나와의 크고 작은 여러 에피소드들 중 사소하고 짧지만 잊지 못하는 이야기 하나나누고자 한다.


"아악!! 아야..."


2004년 2월의 어느 추운 겨울날, 내가 초등학교 졸업을 한지 불과 일주일이 된 날이었다.

나는 눈 쌓인 집 마당 구석에서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마당에서 키우던 강아지에게 밥을 주러 나갔다가 발목을 삔 것이다. 뒤로 발라당 넘어진 나는 왼쪽 발목에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통증을 느꼈고, 일어서지 못했다. 갑자기 무서워져서 소리 질렀다.


"누메!!! 누메!!!"


'누메'는 내가 누나를 부르는 별명이다. 내가 일곱 살 무렵 때부터 누메라고 불렀는데 어떤 이유로 '누메'라는 별명을 짓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무 입에 잘 붙어서 지금까지도 거리낌 없이 누메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누나를 애타게 불렀건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슬리퍼를 신은 게 잘못된 선택이었다. 전날 밤에 내린 눈은 쌓여 있었지만, 녹기 시작했고, 바닥은 상당히 미끄러운 상태였다. 쓰러진 나를 뒤로하고 맛있게 밥을 먹는 우리 강아지 등을 바라보며 누나를 계속 애타게 불렀다. 계속 답이 없었다.

사실, 내가 넘어지기 전날, 누나와 나는 크게 다퉜다. 늘 그렇듯 사소한 일 때문에 서로 삐져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넘어지자마자 나에게 마음을 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누나를 애타게 찾았던 것이다. 누나의 답이 없자, 나는 현관문까지 엎드려 기어갔다. 녹은 눈들을 바지로 다 쓸고 지나갔기 때문에 바지는 완전히 젖었고, 입고 있던 스웨터의 밑단과 팔꿈치 부분도 다 젖어버렸다. 현관문을 열고 다시 한번 외쳤다.


"누메 도와줘!!!"


집 안에 들어와서야 TV를 보던 누나는 여전히 삐진 얼굴이었고 천천히 나에게 눈을 돌렸다. 그리고 비 맞은 거지꼴을 하고 있는 날 신기하다는 듯 보고서는 놀란 말투로 입을 열었다.


"뭐야? 왜? 뭐 한 건데??" 


나는 부어오른 발목을 붙잡으며 말했다.

"나... 강아지 밥 주다가 넘어졌어"


"밥 주다가?..... 하하하하!!!"

누나는 비웃기라도 하듯이 크게 웃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아무리 전날 싸웠다 해도 내가 다쳤는데 웃기만 하는 누나가 원망스러웠다. 나는 갑자기 부어오른 발목을 보고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때, 아빠가 집에 오셨다. 집 근처에서 사진관을 운영하시던 아빠는 외부 모임을 위해 잠깐 옷을 갈아입으러 집에 오신 것이다. 아빠는 급하게 옷을 갈아입으시며 나를 보셨다. 


"다친 거야? 그럼 병원에 가야지! 집 앞 사거리에 있는 한의원 오늘 문 열었더라. 걸을 수 있지? 갔다 와. 아빤 지금 모임 있어서 저녁에 들어올게".


아빠는 부어오른 내 발목을 보고 집 근처 한의원에 다녀올 것을 추천하셨다. 정형외과는 조금 먼 거리에 있어서 나도 한의원에 가는 것에 동의했다. 아빠는 황급히 다시 나가셨고, 나는 다시 일어나 보았다. 


"으아아......"


아직 너무 아팠다. 붓기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고, 선 채로 발을 땅에 디디면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발 자체를 땅에 댈 수 없었다. 누나도 나도 발목을 크게 삔 경험이 없는터라 일단은 한의원에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갈 수 있을까? 나는 누나를 바라보았다. 


"걸어봐 봐! 왜, 안 돼? 진짜로?"

누나는 내가 꾀병이라도 부리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 서린 눈빛으로 날 보며 말했다.


"어 안돼 못 걷겠어!"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야! 업혀."

나는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업히라고! 한의원까지는 가야 할 거 아냐".


나는 너무 아팠기 때문에 아무 말 없이 누나 등에 업혔다. 

당시 나는 중학교 입학을 준비하던 14살이었고 61kg으로 학교에서도 몸무게가 꽤 나가는 편이었다.

반면에 누나는 깡마른 체격에 나보다 조금 작은 키였다. 당연히 나를 업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와다다다다다......'

누나는 엄청 빠른 종종걸음으로 나를 업고 마당을 질주했다. 대문에 다다르자 거의 넘어지듯 나를 내려 좋으며 말했다.


"야, 뭐야? 너 왜 이렇게 무거워!!!"


누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힘없이 웃었고 나도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한참을 웃었다. 원래 우리 집에서 한의원까지 걸어서 5분 거리지만, 2개의 긴 8차대로의 신호등이 있었고 사람들이 꽤 많이 지나다니는 길이었다. 다시 나를 업고서 대문 밖으로 나온 누나는 앞으로 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긴 신호등을 두 개나 지나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에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길거리에 사람들이 많았다. 


"셋 세면 다시 업혀".

누나는 단거리 달리기 시합에 나선 육상선수가 된 것처럼 비장한 말투로 말했다. 


누나와 나는 함께 소리 내어 외쳤다.

"하나.. 둘.. 셋!" 


나는 다시 업혔고, 누나는 엄청 잘고 빠른 종종걸음으로 첫 번째 신호등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보았고, 우리는 너무 웃음이 났다. 신호등 파란불이 되자, 다시 외쳤다. 

"하나.. 둘.. 셋!"


8차선 횡단보도가 얼마나 길던지 누나는 횡단보도 끝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내려놓고 숨을 골랐다. 매번 웃음이 났다. 두 개의 횡단보도를 이렇게 건너고 어느샌가 어제의 싸웠던 기억은 깔끔하게 잊어버렸다. 내가 아픈 와중에도 그저 누나와 나 사이에는 웃음만이 가득했다. 한의원에 무사히 도착하고 나는 한의사의 말대로 발목에 침을 맞았다. 누나는 나를 기다려주었고, 시술이 끝난 뒤 돌아가는 길에 다시 한번 나를 업고 가는 힘든 걸음을 해주었다. 그날 밤, 침만 맞은 나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고, 다음 날 아빠차를 타고 정형외과에 가서야 내 발목이 부러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엑스레이 사진도 찍어보지 않고 침술만 감행한 한의원에 우리 가족은 화가 났지만, 더 악화되기 전에 골절을 확인한 것에 위안을 삼았다.


나는 두 달 동안 초록색 통 깁스를 했고, 생애 처음으로 목발이라는 걸 사용했다. 너무 불편했다. 팔도 아프고 겨드랑이도, 다치지 않은 발목도 깽깽이발을 하다 보니 무게가 실려서 아팠다. 특히 계단을 올라갈 때가 제일 어려웠다. 내가 골절상을 겪어 본 이후로 깁스를 한 사람들의 불편함에 공감하게 되었다. 깁스를 하고 있을 때도 누나는 나를 자주 도와주었다. 누나의 등에 업혀 횡단보도를 건너던 웃긴 상황만 생각하면 아직도 입가에 미소가 서린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동생을 위해 내딛던 그 종종걸음을 떠올리면 사소하지만 고마운 마음이 든다. 지금도 길에서 깁스한 사람들을 보면 누나와 함께했던 2004년 겨울의 차가운 공기와 함께 웃음으로 가득했던 그 순간이 떠오른다. 

이 글을 빌어 누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본다.


파티시에(Pâtissière)인 누나. 그래서 길 가다 마카롱을 보면 누매 생각이 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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