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선 슬리퍼
나는 그날 밤 여러 편의 꿈을 꿨다. 무슨 꿈이었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긍정적인 내용이어서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샤워 후에 환기를 위해 문을 열면서 느껴지는 바깥의 공기는 매우 차갑게 느껴졌다.
"이것이 수능 한파구나...!"
어제처럼 또 혼잣말을 했다.
욕실에서 나오니, 맛있는 냄새가 코를 덮쳤다. 내 도시락 냄새였다. 엄마는 아침 일찍 일어나 주방에서 나를 위한 도시락을 준비해 주시고, 아빠와 함께 기도도 해주셨다. 부모님의 격려를 받고 집을 나선 순간, 나는 마치 전쟁에 참전한 군인처럼 비장한 마음으로 학교를 향해 걸어갔다. 같은 학교로 배정을 받은 친구들과 버스에 함께 탔다. 오늘따라 친구들은 말이 많지 않았다. 서로를 위한 격려만이 오고 갈 뿐이었다. 한파를 뚫고 도착한 학교 앞에는 많은 학생들이 있었다. 교문 앞은 수능을 치러 온 학생들은 물론이고, 학부모님들, 선배들을 응원하기 위해 온 주변 학교의 후배들로 북적였다. 그리고 몇 대의 경찰차와 경찰 오토바이도 보였다. 버스 안의 침묵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시끌벅적한 교문을 지나 교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순간, 신발을 벗으며 나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신발을 벗고 실내에서 신을 삼선슬리퍼를 잊어버리고 안 가져온 것이다. 순간 나는 머리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문구점은 학교에서 3분 거리에 있었지만, 많은 인파를 뚫고 다시 나갔다가 들어가고 싶지 않았고, 일초라도 빨리 교실에 들어가서 교실 환경에 적응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맨발로 그냥 올라갔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교실에 들어와 앉았다. 교실 안도 여전히 추웠고, 서서히 발이 시렸다. 양말이 두꺼워도 슬리퍼가 없으니 내 발은 아프게 시렸다. 시험 시작까지는 약 20분 정도 남은 시점이었고 결국 나는 문구점에 가서 슬리퍼를 사 오기로 결정했다. 다시 학교를 나와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등과 목과 얼굴에 땀방울이 흘렀고, 금방 문구점에 도착했다. 슬리퍼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리자 주인아주머니는 빨리 가져와주셨고, 힘내라고 격려의 말씀을 해 주셨다. 감사하다고 하고 계산을 하려 하는데, 내 주머니는 비어 있었다. 그래서 외상을 하겠다고 하자, 아주머니는 그냥 수능만 잘 보라며 그냥 가도 된다고 웃으셨다. 나는 그 미소를 잊지 못한다. 그 미소는 나에게 특별한 격려이자 힘과도 같았다. 친절한 사람을 만나는 게 기쁜 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다시 교실에 뛰어와서 새 슬리퍼로 갈아 신고 자리에 앉으니, 훨씬 발이 따뜻했고,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문구점 아주머니께 감사한 마음을 뒤로하고, 수능 시험 1교시 언어영역에 집중했다. 그리고 곧, 수능이 시작됐다.
1교시 언어영역을 마치고 간 화장실에는 하얀 담배연기가 가득 차 있었다. 성인으로 보이는 분들의 욕설도 들리고 담배 냄새가 진동을 했다. 2교시 수리영역까지 마친 다음에는 점심시간이어서 엄마표 도시락을 먹을 수 있었다. 늘 맛있었는데... 그날은 긴장을 해서인지 맛도 못 느끼고 그냥 먹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도 남기지 않고 싹 비웠다. 3교시 외국어영역은 듣기 부분이 좀 아쉬웠지만 무난했고, 4교시 탐구영역은 몇 부분 헷갈리는 부분이 있어서 조금 찜찜했다. 어쨌든, 탐구영역이 끝나는 종소리가 들렸고, 수능이 끝났다. 중학교 때부터 들어왔던 '수능'이라는 인생의 한 과정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그 끝이 아픔이든 환희이든, 나는 '끝났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다 마치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친구들은 각자 집으로 가고 나는 다시 길 위에 혼자가 되었다. 피곤해서 하품을 하고 하늘을 바라보니, 석양이 드리워져 있었다. 주황색 하늘이 아름다웠다. 나는 갑자기 집에 들어가기 전에 성당에 가고 싶어졌다. 집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성당에 가서 앉아있었다. 내가 이렇게 수능을 열심히 본 이유는 내 꿈인, 사제가 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에 가톨릭 신학교에 들어가려면 등급제로 최소 3등급 정도 되어야 했다. 아주 높은 커트라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보아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성당에 들어온 나의 머릿속은 침묵 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지금쯤 인터넷에 수능 난이도가 떴겠지? 어려운 수준인가? 물수능인가?'
'각 과목의 해설강의들이 떴겠지?', '나는 전체 평균이 3등급은 나올까?'
'엄마, 아빠한텐 어떻게 말하지? 그냥 무난했다고 얘기할까? 조금 불안한 게 사실인데......'
수많은 생각들과 함께 성당에 있었다.
10분쯤 지났을까? 성당의 고요함이 마음에 들어와 편안함을 선물해 주었다. 의자 아래 내 발을 보니, 내 발에는 여전히 삼선 슬리퍼가 신겨져 있었다. 나는 편해서 슬리퍼를 벗지 않고 있었다. 순간 슬리퍼를 그냥 주신 아주머니가 생각이 났다. 아주머니의 응원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내 눈앞에는 활짝 웃고 있는 성모자상이 그려져 있는 스테인드글라스가 석양을 통해 아름답게 비치고 있었다. 저녁 7시가 넘어서야 성당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늘 다니던 길이지만 무언가 후련하고 허탈한 느낌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가족들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항상 나를 지켜주는 우리 가족. 불안한 내 마음을 잘 아는지 그날 저녁은 가족과 함께 맛있게 먹었다. 나의 수능은 이렇게 끝이 났다. 성적표를 받은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 에피소드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는 하염없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수능시험이라는 삶의 과제를 치러낼 수 있었던 것에 스스로 자랑스러웠고,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문구점 아주머니의 응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 모두 감사할 일이었다. 이 글을 빌어 나를 응원해 준 가족들, 친구들, 문구점 아주머니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