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부터 내 꿈은 천주교 신부가 되는 것이었다. 현재의 나는 그 꿈을 이루었고, 꿈과 함께 살다가, 다시 새로운 꿈의 길을 걷고 있는 상황이다. 삶을 더 넓게 바라본다면, 이 꿈들은 각각 나누어져 있다기보다는 '나'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삶의 조각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마치 나무를 볼 때 수많은 나뭇가지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누구의 삶이든지 소중하고 각자의 꿈도 소중하다. 무언가 바라는 것을 마음에 품는 힘이 있다는 것은 정말 큰 힘이며 일상을 살게 하는 에너지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내 마음속에 늘 꿈이 있음에 나는 늘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2009년 12월 초, 수능시험을 치른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 성적표를 받게 되었다. 반의 분위기는 싸늘한 느낌이었다. 즐거워하는 친구들은 맘 놓고 기뻐하진 못하고 나와 같이 기대 이하의 성적을 받아 든 친구들은 애써 무표정을 지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발이 너무 무거웠다. 지금까지의 시험 성적은 부모님께 보여드리는 것 자체가 조금의 스트레스였을 뿐이었는데, 수능시험 성적표는 스트레스의 무게감이 달랐다. 내 꿈을 향해 가는 첫걸음이 무산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신학교에 입학해야 하는데, 신학교에 갈 수 있는 성적보다 낮은 성적을 받은 것이 내가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었다. 신학교 입학 담당 신부님께 찾아가서 성적표 제출을 했더니 당일에 바로 입학이 어렵다고 연락을 받았다. 마음이 아팠다. 학교에서, 독서실에서, 집에서 조금씩 쉬었던 짧은 순간들이 후회되었다. 부모님은 오히려 나를 격려해 주셨고 1년 재수해서 다시 도전하기로 했다. 다시 재수하기로 결정하고 나자, 마음이 공허해지는 느낌이었다. 쉼터가 필요했다.
성적표를 받고 재수를 결정한 지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우연한 계기로 한 수도회 신부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 신부님은 본인이 소속된 수도회에 쉬러 오라고 초대해 주었다. 쉼이 필요했던 나는 초대에 승낙했고, 난생처음 수도회라는 곳에 2주간 묵을 기회를 얻었다. 가족들도 모두 동의해 주었고, 학교 담임선생님도 수능 끝난 고3이라 2주일 정도 학교를 쉴 수 있게 해 주셨다. 수도원에 가던 날, KTX를 타고 2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이동했다. 12월 중순이어서 날씨가 많이 추웠는데, 아빠가 함께 동행해 주셨다. 나는 아빠의 그날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나는 아빠와 마주 보는 의자에 앉아서 천천히 이야기했다. 아빠와 이렇게 오랜 시간 차분하게 이야기한 게 처음인 것 같았다.
"수도원에 가서 머물기 싫거나.. 어렵거나.. 집에 오고 싶으면.. 바로 와".
아빠는 조곤조곤 말했다. 수도원이라는 곳이 아빠에게는 가난하고 밥도 잘 못 먹고 힘들게 기도만 하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고 한다. 나는 "우리 집이 최고의 휴식처야"라고 말하고자 하는 아빠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빠의 젊었던 시절 이야기도 들으며 기차에서의 두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기차역에서 내리고 또 한 번 버스를 타고 시골로 들어갔다. 버스에서 내리고 수도원에 도착한 후, 아빠는 "잘 쉬어, 연락하고" 이 한마디를 남기시고 홀로 집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셨다. 홀로 남겨진 나는 곧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다. 수도원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데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되었고, 긴 시간 머물게 되었다.
'이런 게 하느님의 계획이라는 건가?'
긴장되는 마음을 품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수도원에서 만난 사람들은 매우 친절했다. 수사님들, 피정을 오신 분들 모두가 밝고 함께 기도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특히 나는 기도시간에 성가를 부르는 순간이 제일 와닿았다. 수도원 성당에 있으면서 순간적으로 "이 아름다운 선율 안에 내 목소리도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앞뒤 잴 것 없이 책임자 신부님께 수도원이 좋다고 이야기했다. 나의 이야기는 곧 수도원 입회를 희망하는 젊은이의 이야기가 되었다. 나의 이야기는 받아들여졌고, 공교롭게도 며칠 뒤에 신학교 입학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짧은 기간 시험을 준비했고, 노력 끝에 합격하여 수도회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수능과 별개의 시험이었고, 내 꿈은 교구 사제에서 수도회에 소속된 사제로 방향을 달리하게 되었다. 몇 주간 나에게 벌어진 사건들이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려움 속에서 밝은 빛을 찾은 기분이었다. 가족들은 처음에는 걱정하다가 곧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자'라고 한마음을 품었다.
이렇게 내 꿈의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미리 그려놓은 꿈이 있었지만, 현실에 부딪치며 새로운 길로 걸어갔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했다. 오늘날 이 일들을 바라보면,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임을 가슴 깊이 느낀다. 이 글을 빌어 함께 마음 깊이 아파하고 기뻐해 준 가족들과 꿈의 첫 단추를 끼우게 해 준 수도회에서 만났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