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맞닥뜨린 결락

by 나잘스프레이

감정은 더 이상 궤적을 그리지 않는다. 어디로 향하는 선이 아니라 되돌아오는 원에 가깝다. 시작과 끝이 서로를 밀어내지 못한 채, 같은 자리를 서서히 닳게 만든다. 그 원 안에서 앞으로 가지도, 완전히 멈추지도 못한 채 같은 속도로 감정을 소모한다.


순환의 틈에서 문득 하나의 사실이 드러난다. 모든 감정의 중심에는 과잉도, 결핍도 아닌 결락이 있다는 것. 채워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떨어져 나가 처음부터 비어 있던 자리. 죽어야 할 때 죽을 수 없는 인간, 살아 있어야 할 때 살아 있지 못한 인간은 그 무엇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아닐까. 이 질문은 윤리적인 측면이라기보다 존재의 상태에 가까운 의문으로 남는다. 어쩌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타이밍에서 밀려난 생의 형식.


살아 있으나 살아 있다는 감각이 결여되어 있고, 끝을 상상하지만 끝으로 갈 권한은 없는 채로 시간 위에 남겨져 있다. 이 어긋남은 고통이라기보다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공백처럼 끊임없이 따라온다. 시리고 찬 바람이 불 때 파도는 더 격렬하게 부서진다. 부서지면서도 사라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으면서도 같은 형태의 파도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그저, 그 산산한 물결의 모양을 바라본다. 완결되지 못한 몸짓, 도달하지 못한 충돌 그리고 남겨진 잔해들.


결락은 상처처럼 아프지 않다. 피가 나지도, 통증이 분명하지도 않다. 다만, 없다는 사실만이 지속적으로 감각을 잠식한다.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인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존재 자체를 서늘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원은 나를 파괴하지도, 구원하지도 않는다. 그저, 비어 있는 중심을 축으로 같은 반경을 반복하게 할 뿐이다. 이러한 반복 속에서 나의 결락을 점점 또렷하게 인식한다.


무너진 것이 아니라 이미 떨어져 나간 무언가를 뒤늦게 알아차린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인식이야말로 지금까지의 감정들 - 무기력, 불안, 반복, 거짓,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구조로 연결되는 지점일지도 모르겠다.


시린 바람 속에서 파도는 다시 일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저 부서진 채로 바다의 일부로 돌아간다. 비로소 그 앞에서 묻게 된다. 결락을 안고도 존재는 계속될 수 있는가. 혹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의 대답인 것은 아닐까. 오늘도 원을 한 바퀴 더 돈다. 도달하지 못했지만, 완전히 벗어나지도 않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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