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가혹하지 않도록

by 나잘스프레이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온 음울과 허상 그리고 무너짐의 현상들은 결국 앞서 지나온 문장들의 다른 반복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부정하지 않는다. 같은 말을 다른 순서로 배치해 다시 설득하려 했던 시간들. 그 시간들 위에서 나는 나의 감정을 조금 늦게 알아차린다.


시간이라는 것은 늘 같은 속도로 흐르지 않는다. 어떤 시절은 찰나에 사라지고, 어떤 시절은 멈춘 채로 그 안에 나를 가둔다. 그 차이는 시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위에 놓인 감정들이 어떻게 부딪혔는가에 따라 생겨난다.


결락과 원으로 이어진 이 궤도 위에서 실수하는 삶과 실패하는 삶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삶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본다. 그것들은 순서가 아니라 겹침에 가깝다. 실수는 실패로 흘러가고, 실패는 다시 그 삶으로 되돌아오며 그 경계에서 계속 머뭇거린다. 이 반복 속에서 하나의 인식이 뒤늦게 고개를 든다. 자존감을 너무 이른 시기에 잃어버렸다는 것. 스스로를 지탱해 줄 최소한의 신뢰를 내려놓았다는 사실. 그 이후로 자존감은 존재의 가치를 기억하지 못한 채 오래 방치되어 왔다. 지켜야 할 것이 아니라 버텨야 할 허울로만 남아 나를 더 작게 만들었다. 나는 나를 세우는 대신 나를 줄이는 법을 먼저 배워버렸다. 그렇게 사랑받을 줄 알았다.


현실은 달랐다. 점점 움츠러들고, 도전은 위험이 되었고, 선택은 부담이 되었으며, 나아간다는 말은 언제나 초과하는 언어로 남았다. 보이는 것과 다르게. 나는 세상을 향해 낮춘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먼저 고개를 숙였다. 음울의 형상을 빌려 예상된 실패를 안고.


이 모든 과정을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바라보는 중이다. 비난도 연민도 아닌 관조에 가까운 시선으로.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묻기보다 이렇게 되어온 시간의 결을 하나씩 짚어본다. 삶은 늘 실패와 성공의 축 위에 놓여 있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은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 채 그냥 흘러갔고, 그 흐름을 견디며 나름의 방식으로 존재를 유지해 왔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삶은 조금 덜 가혹해진다.


다시 일어서기보다는 무너졌던 자리의 높이를 처음으로 재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이 관조는 희망을 약속하지 않지만, 적어도 자기기만으로부터는 조금 멀어지게 하는 것 같다. 결락을 안은 채 원을 오늘도 돈다. 다만 이 반복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지 않는 사실을 깨닫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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