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떠오르는 것은 관계였다. 나와 타인 사이의 거리 그리고 나와 나 자신 사이의 간극. 어딘가 맞닿아 있어야 할 것들이 어긋난 궤도로 미끄러지듯 멀어져 가는 장면이 낮고 둔탁한 파도처럼 가슴 안쪽을 때린다. 나는 종종 내가 만든 사회적 자아의 껍질을 너무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조금씩 다듬어온 말투, 무심하게 쌓아 올린 태도, 감춰두면 안전하다고 믿었던 감정들. 모든 것들이 나도 모르게 ‘나’라고 불리기 시작한 뒤부터 정작 본질적인 나는 어디쯤에 머물러 있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괴리감은 어느 순간 관계 속에서 더 뚜렷해진다. 다정하게 대하면서도 마음은 닿지 않고, 다가가고 싶어 하면서도 뒷걸음치는 습관이 생기고, 말을 건네면서도 침묵에 가까운 고백을 머릿속에서 삼켜버린다. 결정해야 할 순간들 앞에서 나는 더욱 멈칫거린다. 무엇을 선택해야 ‘나다운지’ 무엇을 선택하면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지’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충돌이 너무 잦다 보니 어느새 선택은 고통이 되고, 결정은 내 삶에서 가장 낯선 행위가 되었다. 그저, 순간이 흘러가는 대로 삶을 태워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무기력해진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누구에게도 선명하게 닿지 못하는 존재. 나 자신에게조차 닿지 못하는 존재. 그렇게 흔들리는 사이에서 관계는 점점 더 희미한 윤곽으로 흩어지고 그 흐릿함 속에서 나는 또 다른 형태의 어둠을 마주하게 된다.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살아가려 할수록 내 안의 본질은 더 얇아지고, 더 투명해지고, 더 멀어진다. 견고해야 할 중심은 조금만 건드려도 일그러지는 용융된 유리처럼 위태로운 빛을 반사하고 깨져버려 사라진다.
그래서일까, 관계 속에서 나는 종종 ‘내가 아닌 어떤 나’를 연기하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 연기가 깊어질수록 나는 내가 누구였는지 잊어가는 사람처럼 자꾸 멍해진다. 어디까지가 사회적 자아이고 어디서부터가 본질적인 나인지 모르는 채. 그 경계에서 파도처럼 흔들리는 매 순간이 어둠보다 더 무겁게 느껴진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좋아서 시작한 모든 것들이 과연 진실인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모든 것들이 지친다.
어쩌면, 나는 관계 속에서조차, 꿈을 꾸는 오늘에서조차, 다가가고 싶은 모습조차 가라앉는 이곳에서 진실과 망상의 혼돈을 붙잡고 깊은숨을 몰아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투명해지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