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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린 Oct 29. 2022

퇴장, 그 이후

천 개의 이야기



 아이들은 지금 휴가 중이다. 우리 부부도 휴가 중이다. 아이들은 천 개의 이야기를 가졌다는 천 개의 섬 몰디브로 떠났고 우리는 아들네에 잠시 와있다. 혼자 남겨진 하루를 돌보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소설책과 시집을 읽으며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베란다에서 내려다본 옆집 텃밭, 일 년 사이 많이 허름해진 것 같다.


 내려가 풀을 뽑고 있던 옆집 할머니께 물었더니 허리를 다쳐 한 동안 고생하셨단다. 이제는 겁이 나 손을 못 대고 있다 했다. 키를 세운 코스모스 앞에 노란 꽃이 무성하게 피어있었다. 꽃 이름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잘 모르겠단다. '저기 사는 친구가 준 것인데…’하며 말끝을 흐리신다. 친구는 몇 년 전 폐암으로 갔는데 꽃은 이렇게 해마다 피니 세월이 참 무상하다 하셨다. 그래도 남아있는 이의 기억이 살아있는 한 서로의 사랑과 우정은 계속되는 것이리라.


 하루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귀는 사막처럼 막막해지고 몸집은 자꾸 무거워 드러눕기만 한다. 척박한 땅 스코틀랜드의 양치기 개로 이 집에 온 지 9년 정도 되었다. 잘 생기고 민첩해서 보는 사람들마다 탐을 냈으나 그도 어느새 노년에 들어섰다. 밖에 나가면 달려오는 자동차마다 고함을 질러대곤 했는데 그 패기는 사라지고 뒤뚱거리며 자꾸만 뒤를 돌아다본다. 그는 무엇을 자꾸만 뒤돌아보는 걸까. 조상들이 한가로이 양을 몰던 고향 언덕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걸까? 어쩌면 지나온 시절을 되돌아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족처럼 함께 지내온 대상이 점점 노쇠해 가는 것을 보는 일은 조금은 쓸쓸한 일이다. 


 하루와 함께 며칠을 지내다 보니 오랫동안 누워계시던 어머니 생각이 났다. 한 발 절뚝거리며 병원에 들어가셨다가 다른 쪽 다리마저 움직일 수 없게 퇴화되어 결국 당신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신 어머니. 자주 찾아뵙지 못한 미안함은 늘 고통으로 다가온다. 무표정하게 남아있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 그 깊은 침묵 끝에는 닿을 수 없을 것 같아 슬픔은 더욱 커진다. 


 나이 들어가는 것을 마주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다. 하나 둘 찾아오는 신체적 퇴화, 정신적 게으름, 때로는 살아온 날들에 대한 회한까지 겹쳐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돌아보면 누구에게나 한 시절이 있었던 것. 한 번쯤은 있었을 찬란했던 날들. 어쩌면 그 좋은 추억 하나로 무너져가는 무릎을 버티어내는지도 모른다. 


 오래전 헤밍웨이 탄생 120주년을 기념하며 그의 자살의 원인을 다시 조명하는 글을 읽었다. 헤밍웨이도 말년에는 친한 친구를 잃는 슬픔으로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노년에 겪는 상실에 대한 우울은 지나온 모든 삶을 피폐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으며 노년에 대한 생각을 되짚어본다. 힘들게 잡은 고기를 결국 다 내어주고 사투 끝에 가까스로 항구에 돌아온 산티아고.  ‘인간은 파괴될 수 있어도 정복될 수는 없다’는 노인의 외침처럼 육체는 늙어 가더라도 정신적으로는 용기와 도전을 멈추지 않는 노년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화려했던 무대를 뒤로 하고 멀고 지루한 길을 걸어야 하는 노년의 삶은 누구나 거쳐가야 하는 여정이다. 퇴장, 그 이후의 쓸쓸함에 우울해지기보다는 소소한 것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노후를  희망해 본다.


 계단을 오르내리고 우리 힘에는 버거운 하루를 목욕시키다 보니 허리가 뻐근해온다. 부모도 나이 들어감을 아이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천 개의 구름 떼가 지나간다는 푸른 섬 몰디브에서 찍은 멋진 사진을 보내왔다. 우리 부부는  ‘우리도 한 때는 청춘이었지!’ 하며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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