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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린 Aug 08. 2023

제네바 단상 1

메르시와 봉주르가 충돌했다


 요즘 부쩍 방송마다 해외여행 상품 광고가 많이 보인다. 신문지면에도 자주 눈에 띈다. 서유럽과 알프스. 여행상품가격도 만만치 않지만 떠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을 접곤 한다. 여건이 된다면 스위스는 한 번쯤 다시 다녀오고 싶다. 그동안 많이 변했을 것이다. 융프라우까지 올라가는 협궤기차도 생겼고 주변시설도 발전되었다니 이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 같다. 물론 제네바도 다시 들러보고 싶다. 공원, 도서관, 중앙역과 그 앞의 작은 성당, 레만호까지. 

 


 뉴욕에 살던 시절, 스위스 제네바에 근무하고 있던 작은 아이한테 휴가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 휴가는 미리부터 길게 작정하고 떠났던 여정이었다. 번잡한 세상사 잠시 내려놓고 무작정 놀아볼 참이었다. 떠나기 전에 불어나 이태리어를 모른 채 영어 조금 해 가지고는 제네바에서 지내기 힘들다고 해서 인사말과 감사의 말 몇 마디는 배워갔다. 문밖을 나가면 우리말은 물론, 영어 한마디도 듣기 어려우니 귀머거리요 벙어리가 되었다. 슈퍼에서 계산을 끝내고 ‘메르시(merci)’ 한다는 말이 ‘봉주르(Bon Jour)’가 튀어나와 상대방을 무색하게 만들기도 하고, 버스에서 내리기 위해, ‘prochain avvet(다음 정거장)’라는 말이 푸시 더 버튼으로 들려 ‘stop button’을 누르기도 했다. 언어는 통하지 않았으나 뜻은 통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어디 그뿐인가. 밀가루를 사러 갔다가 설탕을 집어오기도 하고, 바디워시 대신 샴푸를 사 오기도 했다. 해먹이고 싶었던 소꼬리찜도, 소꼬리라는 불어를 알 수 없어 손짓발짓만 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사람 사는 세상으로 치면 우리가 살던 뉴욕은 가히 천국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맹으로 산다는 것은 답답하기도 하고 조금은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다.



 제네바의 겨울은 조금 쓸쓸했다. 날씨도 날씨려니와 사람 사는 곳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한적하고 조용했다. 스위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라지만 뉴욕에 비하면 아니 서울과 비교해도 너무 좁았다. 동서는 말할 것도 없고 남과 북으로도 한 시간이면 다 건너갈 수 있을 만큼 작은 도시 제네바. 무언가 활기를 찾기 위해 무작정 시내로 나가는 버스에 올랐다. 

 구시가지가 있는 바스티옹(Bastions) 공원에서 내려 언덕길을 내려갔다. 세계사 교과서에서 보았던 칼빈과 그의 추종자들 조각이 그려진 종교개혁 기념비(The reformation Wall)를 따라 내려가니 햇살 아래 놓인 작은 카페가 나를 반겼다. 카페 앞에는 노인들이 겨울볕을 껴입고 체스를 두고 있었다. 나이 든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것은 세계 어디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따뜻한 커피를 한 잔 사들고 벤치에 앉아 구름 몇 점 앉아 있는 제네바 도서관 건물을 바라보았다. 공원, 햇살, 도서관, 바람, 내가 좋아하는 선물들이다.

 커피를 마시고 건너편에 있는 도서관으로 갔다. 대부분 아니 거의 모든 도서들은 알아볼 수 없는 언어들이다. 그래도 자리를 잡고 아무 책이나 꺼내 펼쳐보았다. 그리고 고서들의 내음을 맡아보았다. 아무것도 읽을 수는 없지만 책에서 풍기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향기는 더 할 수 없는 동경의 작은 물결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그렇게 까막눈으로 이 책 저 책을 훑어보고, 책상에도 앉아 보고, 창밖으로 흘러가는 생각들을 노트에 적다 보니 어느새 저녁해가 지고 있었다. 도서관에 와 있으면 왠지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나만의 착각, 도서관문을 나서며 행복함에 젖어 수위아저씨에게 야무지게 저녁 인사를 했다. ‘봉수와(Bon Soir)’.

 머무르면 마음의 평화가 내리는 곳, 또 하나의 가족이 살고 있는 곳. 일 년 내내 자식들과 떨어져 살아온 외로움에 대한 잠깐의 보상이지만, 가족이 함께 머물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생각했다. 




  그 후로도 우리가 방문했던 계절은 가을이거나 겨울이었다. 이 더운 여름날 잔디밭에 앉아 레만호의 시원한 물기둥을 바라보는 상상을 해본다. 스위스는 겨울이 제 멋이지만 이 여름은 어떤 모습일까? 이제 먼 길 여행은 쉽지 않아 보인다. 랜선 여행이나 추억 속의 풍광을 그려보는 일이 더 많은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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