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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린 Aug 14. 2023

호수 속에 잠긴 도시 안시

제네바 단상 2

 제네바는 벌써 세 번째 방문이지만 여전히 낯설다. 겨울에는 햇살과 구름과 가끔은 눈과 비로 하루를 열고 닫는다. 찾아 나서지 않으면 마치 어느 시골에 와 있는 것 같이 적막하고 한가롭다. 오늘도 아침에 일던 햇살은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고 눈발이 성성 날린다. 

 아들네에 온 지도 어느새 한 달이 되어간다.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나들이를 위해 우리는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버스터미널은 한산하고 휑해 보였다. 손님이라곤 우리와 세 사람뿐이었다. 버스는 이내 제네바 교외를 벗어나 프랑스 땅으로 진입했다. 들판은 따뜻한 햇살로 눈이 부셨지만 멀리 알프스 산자락에는 성성한 눈 더께가 하얀 모자처럼 덮여 있었다. 동화 속 그림 같은 스물몇 개의 작은 마을을 들고 나오며 1시간 20분 정도를 달리니 프랑스의 옛 수도였다는 안시(Annecy)가 나타났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방향감각을 잃어버렸다. 분명 호수는 산 밑에 있을 것 같은데, 표지판은 반대를 가리키고 있었다. 표지판대로 따라가 보니 다시 버스터미널이 나왔다. 가까스로 기차역 여행자정보센터를 찾아 안내 책자를 얻을 수 있었다. 지도의 안내대로 작은 운하를 따라가니 다채로운 구시가지가 나타났다. 길 잃은 여행자에겐 작지만 소중한 이 지도 한 장이 수 십 명의 이방인보다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색된 건물의 벽에서 화려했던 안시 옛 모습의 냄새가 나는 듯했다. 문득 도시도 사람도 세월이 넘겨주는 퇴락과 쓸쓸함은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향수에 젖어 있는 사이, 운하 주변에 있는 노천카페와 레스토랑들이 오감을 자극하며 서로 다른 몸짓으로 우리를 유혹했다. 아마 점심시간이 지난 탓인지 허기가 더 심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호수를 보고 나서야 점심을 먹어야 할 것 같아 발길을 재촉했다. 작은 성당건물을 지나 운하가 끝나는 곳에 이르니 시야가 확 트이고 멀리 눈에 덮인 알프스 산자락이 보였다. 아, 알프스 그리고 저 푸른 호수…

 둘러보니 운하 한가운데 세워진 작은 성 같은 건물이 반짝이는 물 위에서 출렁거렸다. 중세시대와 2차 대전 시, 감옥으로도 사용되다가 이제는 박물관으로 유명해진 팔레 드릴(Palais de L’lle). 옛 것을 버리지 않고 역사와 기록의 장소로 이용하는 이들의 지혜가 새삼 신선하게 다가왔다. 



 점심 후, 호수를 따라 무작정 천천히 걷기로 했다. 14km나 되는 호수를 한 바퀴 돌아오는 하이킹이 인기라선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푸른 호수를 따라 눈부시게 빛나는 파란 페달들이 가까이 또 멀리 다가오고 사라졌다. 문득 동해안을 따라 달리던 자전거여행길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관광객만은 아닌 듯 수많은 사람들이 호숫가를 걷고 있었다. 아이를 유모차에 밀고 가는 젊은 엄마, 휠체어를 타고 가는 아저씨, 함박웃음을 터트리며 지나가는 젊은 커플, 힘겹게 달리는 할아버지,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아이들. 푸르고 맑은 호수, 초록빛의 물을 본 순간 내 마음 구석구석까지도 비칠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안시호에서 지나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지친 모습보다는 밝고 흥겨운 웃음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물빛 때문이었을까?

계절마다 각종 페스티벌과 콘서트, 마라톤과 사이클링, 수영대회, 국제행사까지 다양한 이벤트가 열리는 마을. 마을사람들이 호수를 구심점으로 태양과 문화와 전통을 즐기고 공유하는 삶의 여유가 부럽기도 하고 샘이 나기도 했다. 

 어느새 석양이 물들어 가는 시간인데도 우리는 아직 호수의 초입에 머무르고 있었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속 번민이 맑은 호숫물에 씻겨져 나간 듯했다. ‘프랑스의 리틀 베니스’, 최근에는 젊은이들의 허니문코스로도 추천받는 곳, 안시. 제네바에 머무르면서 파리로, 리용으로 그리고 안시까지 돌아보았으니 결혼 40년 만에 우연찮게 젊은이들의 허니문 길을 따라와 본 셈이다. 



 걷기만 해도 행복했던 마을을 뒤로한 채 다시 시외버스에 올랐다. 멀리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도 서서히 저녁놀이 지기 시작했다. 커피 잔 속에 정성스레 그려 넣은 라테아트의 나뭇잎처럼 시골 마을도 서서히 우윳빛과 갈색 빛으로 변해갔다. 목가적인 서정이 수묵화처럼 번져가는 저녁 풍광을 바라보며 안시 호수에게 인사를 전했다. 너의 속내처럼, 나도 거칠 것 없이 맑고 푸르고 그리고 빛나게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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