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나는 바쁜 일정 속에서 최선을 다해 헤엄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어렵냐는 친구의 말에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껴 오랜만에 친구와 시간을 갖기로 했다. 지금보다 어릴 때 뚜벅이였던 우리는 우리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장소에서 만남을 약속하곤 했다. 예를 들어 건널목 큰 나무 앞에서 보자는 식으로. 그러나 지금은 한 동네에 살지 않을뿐더러, 둘 다 어엿한 차주가 되어 주차가 되는 중간지점의 카페를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매야만 했다. 평소에는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인 차가 짐짝처럼 느껴지는 이런 순간마다 나는 서울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튼 쉽지 않았던 조율의 끝자락에서 친구를 만났을 때, 친구는 내게 첫마디를 던졌다.
"야, 너 엄청 느낌 있어졌다."
사실 예상했다. 최근에 내가 가장 많이 듣고 있는 말이니까.
처음으로 이 말을 듣기 시작한 것은 2023년 2월 14일이었다. 나는 2022년 2학기, 즉 나의 대학원 마지막 학기의 끝 무렵부터 너무 바빴다. 개인 일정도 바빴고 공부해야 할 것도 산더미였다. 그래서 다른 일정에까지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심지어는 머리를 자르러 가는 일정에도 도저히 눈을 돌릴 틈이 없었다. 원래 3주마다 머리를 자르러 가는 나인데, 이번만큼을 규칙을 깨야 했다. 정말 너무 바빴으니까. 이때가 시기적으로 보았을 때는 종강까지 2주 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그래서 2주만 더 버텨보기로 하고 머리에 대해 신경을 끈 채, 나의 일정에 몰두하기로 했었다.
시간은 참 빨랐다. 2주의 시간은 쏜살같았고 마침내 나는 종강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바빴다. 대학원 졸업은 오히려 나를 더 바쁘게 만들었다. 사실 대학원이라는 녀석이 졸업하는 나에게 몰래 졸업선물로 바쁨을 한 보따리 가져다 놓고 도망간 건 아닐까? 참 멋진(?) 졸업선물이다. 아무튼 나는 이런 연유로 2023년 2월 14일까지 머리를 자르지 못했다. 그리고 바로 이날은 대학원 졸업식이 있던 날이었다. 동기들은 머리가 길어져서 나타난 나를 보고 모두 같은 이야기를 했다. 못 본 사이에 엄청 느낌 있어졌다고. 이 시점부터 머리가 길긴 길었나 보다. 이때부터 소속된 모든 곳에서 머리가 길어 느낌 있다는 말을 꾸준히 듣게 된 걸 생각해 보니까.
조금은 이런 상황들이 웃겼다. 바쁜 일정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타협의 결과로 머리 자르는 일을 우선순위의 마지막쯤으로 미뤄놨을 뿐인데, 그 결과가 나를 느낌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놓았다니. 어딘지 흡족하기도 하고, 바쁜 일정들이 끝나더라도 머리는 그냥 둘까 싶게 만들기도 하는 흥미로운 상황이었다. 시간을 쪼개어 친구와 오랜만에 만난 시점은 그때로부터 한 달하고도 보름 정도가 더 지난 때다 보니, 머리는 전보다도 더 많이 길었으리라. 느낌도 더 늘었으리라.
나에게 느낌 있어졌다고 말하는 이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우리는 별로 구체적이지 않은 다음 만남에 대한 계획을 이야기하며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다. 운전을 하던 나는 문득 이런 생각에 잠겨, 나 자신에게 속말을 건넸다.
'도대체 느낌 있다는 게 뭐지? 그게 무슨 느낌이지?'
나 자신에게 느낌 있다는 말의 느낌에 대한 느낌을 물은 것이다. 생각해 보니 최근 나에게 느낌 있다고 말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냥 느낌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음악 하는 사람처럼 느낌 있다고, 미술 하는 사람 같은 느낌이 있다고, 전성기의 안정환 선수처럼 느낌 있다고, 예술가의 기운이 느껴지면서 느낌이 있다고. 늘 이런 식이었다. 느낌 있다는 게 뭘까? 느낌 있다는 건 예체능의 영역인 걸까? 아니면 혹시 머리 좀 자르라는 말, 30대답게 좀 하고 다니라며 철 좀 들으라는 말을 예쁘게 돌려서 한 건 아닐까? 잘 모르겠다. 느낌 있다는 말의 느낌에 대한 느낌을.
문득 호기롭게 머리를 아주 많이 길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 기르면 느낌 있다는 말이 다른 말로 바뀔지가 궁금해서. 바빠서 머리 자르러 갈 시간이 없다는 좋은 핑곗거리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