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쇠나라 12. 함정

12. 함정

by 정완기

12. 함정(陷穽)

늦여름으로 접어들었다.

해론은 병부로부터 부친이 있는 가잠성(假岑城)에 통문을 전하라는 명을 받았다. 오래간만에 부친을 만나게 된 것도 기쁜데 양신과 동행해도 좋다는 허가까지 나왔다. 갇혀서 지내는 것과 다름없는 양신도 좀 숨통이 트일 것 같다면서 매우 기뻐했다.

김유신은 퇴청하는 해론에게 자신의 여동생을 만나보라는 귀 띰을 해주었다. 해론은 아지(阿之)와 남몰래 만나는 장소로 향했다. 그녀가 왜 갑자기 보자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지는 해론이 가잠성에 가게 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때문에 한번 만나볼 필요가 있겠단 생각에 오래간 만에 만날 용기를 냈다.

"해론 오라버니,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몰라요."

"그랬군? 아지, 미안해. 오래간만에 만나보니 반갑군."

해론이 반가움을 표하는데 아지는 생끗 웃으며 다른 말을 꺼냈다.

"해론 오라버닌 가잠성으로 언제 떠나게 되나요?"

"이틀 후에 떠나기로 되었어."

"얼마나 있다가 돌아오게 되나요?"

해론은 아지의 얼굴에 수심이 어린 것 같아 음성이 무거워졌다.

"뭐, 오래 걸리겠어? 넉넉잡아 열흘쯤 잡고 있는데 모르겠군."

아지는 좀 망설이듯 물었다.

"해론 오라버닌 무슨 일로 가잠성에 가게 되는 거예요?"

"병부령께서 가잠성에 통문을 전하라는 임무를 부여하셨어. 나는 오래간만에 아버님을 뵙게 될 일로 여간 마음이 설레고 들뜨지가 않아."

아지는 고개만 끄덕이고 그에 대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며칠 전 부친과 김용춘이 나누던 얘기를 우연히 엿들은 게 있었다. 신주정 군주인 변품 장군이 양신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했고, 병부령은 해론이 가잠성까지 양신을 데려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려주려고 만나자고 한 것인데 막상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해론과 아지는 어려서부터 서로가 마음에 둔 사이였다. 그러나 김서현은 두 집안의 가격(家格)이 맞지 않아 혼인은 안 된다고 못 만나게 했다. 그럼에도 김유신은 여동생의 부탁과 친구와 우정을 생각해 부친의 명을 어기고 만남을 주선한 것인데 거기까지로 선을 긋는 입장이었다.

아지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서 해론이 가잠성에 가는 이유를 밝힐 수가 없다는 마음을 굳히고 말았다. 그러자 입장이 어색해져 자기도 모를 말을 흘려냈다.

"나도 이번에 오라버닐 따라 가면 안 될까요?"

"아지, 별 소리를 다하는군?"

해론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설레는 속에 한편으론 김유신이 고마우면서도 야속한 마음도 들었다. 아니 때론 아지와 야합이라도 해 짝을 이뤄볼 마음도 먹었지만 끝내 그럴 수가 없었다.

아지는 무슨 생각에 잠긴 듯한 해론에게 물었다.

"가잠성은 만뢰성과 거리가 먼 곳인가요?"

"그리 멀지가 않아, 그런데 그건 왜 물어?"

"나는 이따금씩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많아서요."

해론은 느닷없이 꺼낸 아지의 말에 가슴이 아팠다. 서로는 은애하는 사이건만 혼인은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괴로움 속에 두 사람이 마음껏 어울렸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그리울 수밖에 없었다.

"아지,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만 하겠어."

아지는 그 말에 아쉬움을 느끼듯 물었다.

"오라버니, 왜 벌써 돌아가려고 그래요?"

해론은 더 있고 싶지만 남의 눈에 띨 것을 걱정해서 둘러대었다.

"나는 떠나기 전에 인사를 다닐 데가 많아서 그래."

아지는 그러는 해론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만남은 이제 이것으로 끝이라는 생각을 했다. 해론은 그녀의 손을 잡을까말까 하다 끝내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녀의 등이 잔물결을 치는 걸로 봐 울고 있음을 알았다. 불현듯 그녀를 데리고 어디로 도망쳐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자신도 이걸로 그쳐야 한다는 생각에 가만히 떼어놓았다. 아지는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해론 오라버니, 떠나기 전에 또 올 수는 없나요?"

해론은 미소만 머금고 대답 없이 몸을 돌려세웠다. 아지는 해론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안기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누른 채 보이지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이튿날 해론은 양신과 함께 김춘추의 집을 방문했다. 그러나 김춘추가 출타해서 그냥 돌아선 뒤 이번엔 출행 인사를 드릴 겸 김호림의 집으로 갔다. 김호림은 해론에게 잘 다녀오라는 말을 했고, 양신에겐 행운을 빈다는 말을 했다. 집으로 돌아간 두 사람은 떠날 준비를 마친 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한 밤 중에 병부에서 나온 전령이 새벽에 일찍 떠나라는 명령을 전하고 돌아갔다.

날이 밝기 전에 해론은 양신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양신은 말에 오르자 어떤 기대와 불안감이 섞갈린 채 해론의 뒤를 따랐다. 교외로 벗어나자 뜻밖에도 김춘추와 김유신이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해론이 급히 말을 세우고 뛰어내려 양신도 따라서 내렸다.

"전군님, 웬일로 여기에 나와 계십니까? 어제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 댁에 계시질 않아서 못 뵈었는데 이렇게라도 인사를 드립니다."

김춘추는 고개만 끄덕이고 양신에게 시선을 돌렸다.

"양신님이 서라벌을 떠나게 되어 나로선 매우 섭섭하오."

"전군님, 저는 잘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양신이 그런 대답을 하는데 김유신은 자신의 등에 지고 있던 밀두도를 벗어들고 양신에게 내밀었다.

"밀두도를 받으시오."

양신은 그 말을 듣고 너무도 반가워서 입이 딱 벌어졌다. 김유신을 만날 때마다 언제쯤 돌려받을 수가 있을까 하고 눈치만 살폈다. 그런데 막상 받게 되자 선뜻 손이 나가질 않았다.

"유신님, 정말 제게 돌려주시는 겁니까?"

"그렇소."

양신은 감격에 겨운 듯 밀두도를 받아들었다.

"유신님, 정말 감사합니다."

김유신은 너털웃음까지 터뜨리며 대답했다.

"나는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밀두도가 탐이 나서 내주고 싶지 않소. 그러나 전군님의 엄한 말씀을 거역할 수는 없는 일이요."

양신은 김춘추에게 다시금 돌아선 뒤 허리를 깊이 숙여 절을 했다. 그가 자신에게 밀두도를 돌려주기 위해 대련 행사를 연 것으로 알고 있어서 여간 감사하는 마음이 아니었다.

"양신님, 밀두도는 자신을 보호하는데 쓰시오."

김춘추의 말에 이어 김유신도 한 마디를 했다.

"양신님, 특히 몸조심을 하고 무사하길 빌겠소."

두 사람은 작별 인사를 던지고 다시 말에 올라 그곳을 떠났다. 양신은 김춘추와 김유신이 보이질 않을 때까지 돌아다보고 있었다. 해론은 그러는 양신의 팔을 잡고 끌었다.

"양신, 말을 타게. 우리는 이제부터 달려 보세."

"그러세."

양신은 대답하고 해론을 따라 말 궁둥이에 채찍을 놓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을 그렇게 달리다 개울이 흐르는 곳에 이르러 말들을 세웠다.

"양신, 말들에게 목을 좀 축이게 하고 가세."

두 사람이 말고삐들을 놔 주자 말들은 물가로 갔다.

"양신, 밀두도를 되찾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가?"

"이를 말인가? 모두가 자네 덕분일세."

"이젠 신라에 대한 야속함을 조금쯤은 접어줄 수가 있겠나?"

양신은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었다.

해론은 가잠성으로 가게 된 뒤로부터 줄곧 어떤 의문에 잠겨야 했었다. 밀두도는 양신이 신라를 떠날 때 돌려주게 되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김춘추의 작별 인사는 어딘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양신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해론, 나는 이제 신라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을 해도 될까?"

"암, 그렇게 하고 싶겠지?"

해론의 대답이 어딘지 애매하다 싶어 양신은 강조하듯 말했다.

"나는 앞으론 무슨 일이 있어도 밀두도를 다시는 내놓지 않겠네."

양신의 음성이 너무도 단호해서 해론은 섬뜩함마저 느꼈다. 거기다 밀두도를 손에 쥐었으니 이젠 신라를 떠나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막상 그렇게 되면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일이었다.

양신은 불순한 의도를 갖고 신라에 온 게 아니었다. 고 남가라에선 신라인의 가슴을 후련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큰 오해를 사고 부당한 억류생활을 해야만 했다. 또 병부령이 자신에게 전령임무를 부여한 것과 양신을 동행하게 해준 것은 어딘지 이상한 일이었다. 뿐더러 김춘추가 던진 작별 인사는 양신에게 작별을 고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간에 의문을 떨칠 수가 없기 때문에 생각을 되씹게 되었다.

북상하는 길은 크고 작은 강줄기나 시냇물이 수없이 건너야 만했다. 하루 종일 평탄한 들판을 지나가다가 험준한 협곡을 뚫고 나가길 되풀이 하면서 해가 지게 되면 길에서 노숙도 했다.

해가 뜨면 휴대해 온 비상식량으로 끼니를 때우고 다시 말에 올랐다. 그렇게 사흘째로 접어든 날 오후에 높은 영(嶺)을 넘게 되었다. 해론은 내리막 길 어디쯤에서 앞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기 가잠성이 보이네!"

양신이 내려다보는 눈앞에 널따란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산길을 내려가자 키를 넘는 갈대숲이 있었다. 그리고 거친 들판의 끝자락에 아담한 성이 하나 보였다. 해론은 조용히 누워 있는 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양신, 저 성이 가잠성일세."

두 사람은 말을 세우고 구리 빛 팔뚝을 쳐들어 이마의 땀들을 닦았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갈대숲 끝자락에 펼쳐진 늪지대엔 나리꽃들이 군락을 이룬 채 요염한 자태를 뽐내듯 피어 있었다. 부근엔 드문드문 자리를 잡은 농가들은 평화롭게 보였다.

두 사람은 5백여 리의 행정을 끝내고 가잠성을 향해 천천히 말을 몰았다. 가까워지는 성벽에 꽂힌 깃발들엔 용(龍), 호(虎) 같은 글자들이 보였다. 성문 앞에 이른 말들이 코투레를 틀었다.

가잠성은 멀리서 볼 땐 아담하게 작았으나 가까이 다가들고 보니 그런대로 위압감을 느낄 만 했다. 적막감 속에 촘촘히 뚫려 있는 화살을 쏟아내는 구멍들이 변방의 야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별안간 호통 소리가 일었다.

"무엇하는 놈들이냐?"

깜짝 놀란 해론은 문루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성문을 열어주시오!"

사람은 보이지 않고 볼멘소리만 터져 나왔다.

"멍청한 놈들아! 신분을 밝혀야 문을 열든지 할 게 아닌가?"

해론은 군복을 입었지만 양신은 평민 입성인 데다 땀과 흙먼지로 범벅이 된 몰골들이었다. 문루에서 보면 정체불명의 대상들일 뿐이었다.

"나는 화랑 낭두 해론이요. 병부의 통문을 받들고 왔소."

해론이 큰 소리로 외치자 문루 위에서 부드러워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알았소. 잠시 기다리시오."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성문이 열렸다. 성문 안으로 들어서자 축축한 습기를 머금은 그늘엔 서늘한 냉기가 돌았다. 두 사람은 생기를 되찾는데 탐스러운 콧수염을 단 장수가 다가들었다.

장년기 나이의 장수는 생의 전부를 전쟁터를 전전한 듯 특유의 살벌함이 얼굴에 담겨져 있었다. 그는 윗입술을 반쪽만 벌리듯 입을 열었다.

"나는 남문 수문장 무덕이다. 지니고 있는 무기를 맡겨라."

해론은 장도와 활을 내주었다.

"받으시오."

양신은 말고삐만 만지작거릴 뿐 그대로 서 있기만 했다.

"양신, 잠시 맡겨 둘 뿐이니 넘기게."

해론의 말에 양신은 마지못해 밀두도를 내주었다.

"우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심한 갈증을 느낀 해론이 물부터 찾았다.

"저 쪽에."

수문장은 무뚝뚝하게 수풀 속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곤두박질을 치듯 달려가서 옹달샘 물을 허겁지겁 퍼마셨다. 겨우 갈증이 풀려서 살 것 같은 표정들을 짓는데 수문장이 천천히 다가들면서 물었다.

"자네들은 몇 살씩이나 먹었나?"

해론은 그 말을 좀 퉁명스럽게 받았다.

"수문장님, 나이는 왜 묻습니까?"

"서라벌의 화랑도가 위험한 변방까지 다 왔으니 기특해서 그러네."

"여기가 무슨 위험한 전쟁터라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해론이 되묻는 말에 수문장은 돌연 언성을 높였다.

"여긴, 신라 서북면에서 최강의 요새지다."

수문장은 대답하고 눈까지 부라렸다.

해론은 비위를 좀 건드려 주려 듯 물었다.

"무슨 요새지가 이렇게 한가해 보이기만 합니까?"

"맹랑한 애숭이들 같으니 여긴 백제군과 수시로 교전을 벌인다."

수문장의 얼굴이 험상궂게 구겨지자 해론은 눙치듯 말했다.

"수문장님, 고깝게 듣지는 마십시오. 저도 가잠성이 어떤 성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성청으로 가서 통문을 전해야 합니다."

수문장은 무뚝뚝해도 인정이 많은 듯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내가 직접 안내하지. 따라들 오게."

"고맙습니다."

성의 중심부에 나지막한 동산이 있고 그 위에 청사가 있었다. 언덕길을 오르는 동안에 성의 안팎이 한 눈에 들어 왔다. 남북은 길고 동서는 짧은 타원형을 이룬 평지성(平地城)이었다.

성 밖은 삼면이 너른 들판으로 둘러싸였고 북쪽만 산줄기에 면했다. 언덕 위 청사 앞마당엔 서너 채의 창고들이 보였다. 창고 앞에서 병졸들이 창, 칼들을 쌓아 놓고 손질을 하고 있었다.

양신은 수문장에게 물었다.

"수문장님, 여기서 가깝게 보이는 강은 이름이 뭔지요?"

"남한수의 지류인 달천일세."

양신은 한수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많이 들어봤던 강 이름이었다. 전에 고구려 판도는 한수 이남까지 미친 적도 있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만큼 조국이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가슴이 마구 뛰었다.

"여기서 해가 지는 서쪽에 백제가 있다."

양신은 무덕의 말을 듣고 백제와 국경은 가까울 것임을 추측했다.

무덕은 청사 앞으로 다가들며 초병에게 물었다.

"서라벌에서 해론 낭두가 왔다. 성주님을 뵐 수가 있겠는가?"

"수문장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병졸은 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해론은 오래간만에 부친을 만날 일로 마음이 들뜨고 조바심이 일었다. 초병이 다시 나왔다.

"수문장님, 들어가셔도 됩니다."

해론은 양신에게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양신,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게. 내가 먼 성주님을 뵙고 말씀을 드린 뒤에 자네도 인사를 드리도록 하겠네."

"그렇게 하세."

해론은 수문장을 따라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성주인 찬덕(讚德)은 두 명의 부장(副將)과 함께 앉자 있었다. 수문장을 따라 들어서는 아들을 보고 좀 놀라듯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소자 문안드립니다."

해론이 덥썩 큰 절을 올리자 찬덕은 딱딱한 음성으로 물었다.

"해론, 그게 무슨 인사법이냐?"

"예?"

"군인으로 사적인 말투를 쓰다니?"

부친의 지적을 받은 해론은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바로 허리를 곧게 세우고 군인 특유의 억양으로 입을 열었다.

"화랑 낭두 해론입니다. 병부의 통문을 전하러 왔습니다."

"잘 왔다."

해론은 통문을 꺼내서 부친에게 바쳤다. 찬덕의 이글거리던 눈매는 아들을 대하는 반가움에 한 순간에 부드러워졌다. 받아든 봉서를 뜯은 뒤 읽고 나서 눈썹을 한번 꿈틀 움직였다.

"합개!"

곁에 있던 약간 등이 굽은 늙은 군관이 대답했다.

"예, 성주님."

"현재 창고에 남은 군량미는 얼마나 되는가?"

"미곡과 잡곡을 합쳐서 5백여 석쯤 됩니다."

"1백석만 남기고 전부 차송할 준비를 하라."

"성주님, 양곡을 어디로 보내게 됩니까?"

"신주정 군단에서 군량미 수송단이 곧 도착하게 되었다."

"예. 군령대로 시행하겠습니다."

합개(蛤蚧)는 대답하고 곧 밖으로 나갔다. 찬덕은 이번엔 병부의 봉투 속에서 다른 서류를 꺼내어 한동안 들여다 본 뒤 길몽(吉夢)에게 서류를 넘겨주며 지시했다.

"길몽, 새로운 무기 설계도가 왔네. 곧 시제품을 만들어 보게."

"예, 성주님."

길몽은 설계도를 받아들고 밖으로 나갔다.

찬덕은 부장들을 내보내고 잠시 무슨 생각에 잠겨들었다. 양곡을 전부 신주정에 차송하고 나면 성 안에 남는 게 너무 적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일어서 석삼(石三) 부장을 불렀다.

"석삼, 성에서 군량미까지 동이 나면 매우 불안해 질 일이 아닌가?"

"성주님, 소관도 합개로부터 들었습니다. 성에 남은 양곡을 그렇게 신주정으로 전부 보내면 남는 게 거의 없게 됩니다."

"신주정 군이 갑자기 많은 양곡을 왜 필요로 하는지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아무튼 간에 명령이니 수행할 수밖에 없다."

"성주님, 한 달 전에 1천 석의 양곡을 공급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만으로도 올 겨울을 넘기고도 남을 양인데 또 보내야 하겠습니까?"

"나도 그게 벌써 바닥이 났을 리는 없다는 생각인데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게 아닐까? 여러 면으로 추측을 해봐도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성주님, 추수를 앞두고 있는 터라 혹시 한산주 백성들에게 긍휼미로 풀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찬덕은 그제야 이해가 가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지난해 한수유역은 심한 가뭄으로 큰 흉년이 들었다. 때문에 굶주린 백성들 중에선 가족을 끌고 백제로 흘러드는 사태까지 빚었다. 거기다 곧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게 된다는 유언비어마저 나돌고 있어서 은연중 민심이 동요하는 분위기가 없지도 않았다.

그래도 금년은 다행이 작황이 좋은 편이었다. 찬덕은 추수 때까진 굶주림으로 고통 받을 백성들이 많을 것으로 보았다. 추수 때까지 버티게 하고자 긍휼미를 풀려는 것으로 추측했다.

"백성들의 고통을 덜게 하려는데 쓴다면 다 보낼 수밖에 없지."

"성주님, 그렇지만 성 안의 양곡은 바닥이 나게 되었습니다."

"석삼, 양곡을 내 주고 창고를 빨리 다시 채우면 된다. 내일부터 관내를 돌면서 추수를 독려하게. 백성들이 추수를 끝내고 조세를 바칠 때까진 상당한 시일을 요하므로 서두르는 게 좋겠다."

"예, 성주님."

"앞으로 양곡을 수송할 땐 야간에만 수행해야 한다."

"백제 첩자들이 눈치를 못 차리게 하라는 말씀이군요?"

"그렇다. 내일부턴 관내 순찰도 강화시켜라. 근래 떠돌이들이 늘어났다는 소문이 도는데 그 속엔 백제 첩자들도 끼어들 수가 있다."

"성주님. 당분간 떠돌이들을 한 군데 가둬두면 어떻겠습니까?"

석삼의 건의에 찬덕은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그렇게 했다간 도리어 첩자들의 관심만 끌게 만든다."

"알겠습니다. 성주님."

석삼도 밖으로 나가자 찬덕은 비로소 아들을 돌아다봤다.

"해론아, 요즘 서라벌의 분위기는 어떠냐?"

"아버님, 어떤 분위기를 말씀하시는지요?"

"병부에서 전쟁 준비를 한다는 소문이 들린다. 너는 그 점에 대해서 혹시 아는 게 있을까 해서 물어보는 것이다."

"소자는 전쟁 준비에 관한 얘긴 들은 바가 없습니다."

"요즘에 병부와 신주정 간을 오가는 전령들이 부쩍 늘었다는 말을 들었다. 너는 그에 대해서도 아는 게 전혀 없느냐?"

"아버님 말씀대로 평소보다 전령들이 자주 오가는 건 확실합니다."

"무슨 일로 그러는지 짐작이 되는 게 없느냐?"

"높은 데서 하는 일이므로 소자가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아버님은 무슨 이상한 점을 느끼신다면 그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이상한 점은 너부터란 생각이다. 너는 화랑도의 검술 교관을 맡고 있지 않느냐? 그런 네가 통문을 전하러 온 것부터가 의외적인 일이다."

"소자는 그런 생각까진 못하고 새 임무를 부여받고 기뻤습니다."

"임무를 부여받은 게 기뻤다고?"

"아버님을 뵐 수가 있으므로 그랬습니다."

"그랬구나?"

"소자는 늘 아버님처럼 참 군인으로 근무하는 걸 바랍니다."

찬덕은 아들이 하는 말에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너는 참 군인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을 하느냐?"

"소자는 최전선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이 참 군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실전에 참가할 수 있는 최전선인 신주정 군에서 한번 근무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이번에 병부령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은 김에 신주정에도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네가 최전선에서 근무를 해보고 싶다니 기특하다!"

찬덕은 아들의 태도가 너무 의연해서 대견함을 느꼈다. 자신도 저만 때는 그랬던 생각에 가슴이 뿌듯해졌다. 그러나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전쟁터만 전전해 온 자신을 아들도 닮은 것 같아 감회가 남달랐다.

찬덕은 비로소 가족들의 안부를 물었다.

"안부가 늦었구나. 네 어머니는 무고하시냐?"

"어머님은 아버님을 매우 보고 싶어 하십니다. 요즘엔 왜 그러시는지 매일처럼 아버님 꿈에서 뵙는다는 말씀도 자주 하시곤 합니다."

"이번 추석엔 한 번 짬을 내보고 싶은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찬덕은 아들의 말을 듣고 가족과 오순도순 살지 못하는 처지를 마음속으로 여간 미안하지가 않는데 해론이 입을 열었다.

"아버님, 소자가 편지에서 썼던 양신과 함께 여기에 왔습니다."

"양신과? 고구려 다갈촌 야좌를 말함인가?"

"예, 아버님."

"양신은 인질 신분으로 우리 집에서 기거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만 그가 이곳엔 무슨 일로 오게 되었단 말인가?"

찬덕은 말하면서 여간 이상한 일로 여기지 않았다.

"병부에서 소자와 동행을 할 수 있도록 특별 허가를 내주었습니다."

"병부에서 그런 허가를 했다는 게 사실이냐?"

찬덕은 묻고 나서 표정이 좀 어두워졌다. 평소에 아들이 보내는 서신을 통해 양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젊은이 치곤 인품이 훌륭한 것 같은데 신라에 와서 매우 어려운 처지가 된 것을 동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으로 온 것에 대해서 심히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지금 어디에 있느냐?"

"밖에 있습니다. 아버님께 인사를 올리게 할까요?"

"데리고 들어오너라. 만나보고 싶다."

해론은 밖으로 나가 양신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 왔다. 양신은 찬덕을 향해 큰 절부터 올렸다.

"성주님, 처음 뵙겠습니다. 고구려에서 온 양신입니다."

찬덕은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양신, 잘 왔네. 해론을 통해 자네 얘길 많이 들어서 관심이 컸네. 그동안 우리 집에서 지내며 불편한 점이 많았을 것으로 여기네."

"성주님, 아닙니다. 소생은 제 집처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머님께서도 절 자식처럼 과분하게 보살피고 챙겨주셔서 너무도 고맙습니다."

찬덕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망설이듯 물었다.

"자넨 신라 다음엔 왜국과 백제까지 둘러 볼 계획이라지?"

"예, 계획은 그렇습니다만 지금은 접었습니다."

찬덕은 실망을 안겨 줄 수가 없어 격려 차원에서 다시 말했다.

"나도 젊어선 여러 나라를 유람하고 싶었네. 그러나 그런 일이 쉽게 이뤄질 수는 없더군. 자네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 앞으로 일은 잘 풀려서 타국을 둘러 볼 수도 있게 될 것일세. 나도 도울 수 있는 한 돕겠네. 그 얘긴 차차 나누기로 하고 오늘은 피곤할 테니 나가서들 쉬게나."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자 합개가 숙소로 안내해 주었다.

이튿날 잠시 단잠을 잤을 뿐인 것 같았는데 두 사람은 해가 높이 떠서야 잠들이 깨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나자 병사 한 명이 와 성주님이 부르신다는 말을 해론에게 전했다. 해론은 병사를 따라 청사로 갔다.

"아버님 잘 주무셨습니까?"

"해론아, 왔구나?"

찬덕은 아들을 불러놓고 다음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병부의 통문 속엔 양신을 신주정으로 보내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좋을 몰라 망설이는 데 해론이 물었다.

"아버님, 여기서 신주정 군단은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2백 여리도 되지 않는다."

"아버님, 가잠성은 변성치곤 매우 중요한 곳으로 알려졌는데 특히 큰 야장방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상주하는 야장들은 얼마나 됩니까?"

"야장들과 딸린 가족들을 합치면 근 2백여 명에 이른다."

해론은 적이 놀라며 물었다.

"이 성에 야장과 가족들이 그렇게 많이 사는 줄은 몰랐습니다."

찬덕은 아들의 말에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신라에서 여기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도 없다. 신주정 군단이 전면에서 고구려와 대치해 방어책임을 진다면 가잠성은 후방에서 병참 기지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당항성으로 가는 중요한 교역로를 백제군으로부터 지켜내는 임무도 수행해 내고 있다."

"아버님, 이 성이 백제군과 충돌이 잦다는 말은 그 때문이군요?"

"그렇다. 이 성은 당항성을 오가는 상단들의 주요한 교역로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단들의 호위도 맡고 있으므로 백제군과 소소한 충돌을 빚을 때가 많다."

해론은 부친의 말을 듣고 좀 불만스러운 점이 있었다.

"아버님은 여러 가지로 얼마나 어깨가 무거우실 지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서라벌에선 신주정 군의 중요성만 화제에 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주정 배후에서 여러 중요한 역할을 맡는 가잠성에 대해선 별로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소자는 그 생각을 하면 속이 좀 상합니다."

찬덕은 그런 말을 하는 아들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모처럼 다정하게 어깨를 감싸 안고 후원으로 갔다. 큰 고목나무 밑에 놓인 평상에 아들과 나란히 앉은 뒤 성 밖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곳은 평야가 매우 넓은 지역이다. 그런데다 당항성은 중원과 교역이 날로 번성해져 인총이 계속 늘어나는 곳이다. 백제군은 그런 당항성 포구를 호시탐탐 넘겨다보고 우리 상단을 습격할 때가 많다. 그런 충돌이 잦아 며칠 전만해도 당항성으로 향하는 길이 백제군에 일시 차단되었다. 성 병력이 출동해 백제군과 한바탕 교전을 벌여 퇴치했다. 이래저래 가잠성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지게 되었다."

해론은 부친의 설명을 듣고 물었다.

"여기서 서쪽에 있다는 당항성 포구까진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일백 여리가 좀 안 된다."

"아버님, 소자는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에 당항성 포구를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너는 거길 무슨 일로 가보려고 한단 말이냐?"

"그냥 구경삼아 가봤으면 합니다."

찬덕은 아들의 말을 왠지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해론은 어떤 생각이 있어서 꺼낸 말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나누고 찬덕은 침묵을 지키는데 해론이 물었다.

"아버님, 근처에 큰 냇물이 흐르는 봤는데 이름이 있습니까?"

"남한수의 지류인 달천으로 우리 성이 매우 유용하게 쓰는 냇물이다."

"달천엔 많은 배들이 매어져 있었는데 뭣에 쓰는 배들입니까?"

"야장방에서 쓰는 철광석을 실어 나르는 배들이다. 그리고 신주정에 보급품을 공급할 때도 이용을 해서 배들이 많은 편이다."

"아버님, 이 성의 야장방에서 쓰는 철광석은 어디서 나옵니까?"

"달천 변엔 질 좋은 사철이 난다. 그리고 근처인 대목악, 삼년산, 미곡 등지에도 철산지가 있다. 또 이 부근에 있는 내제, 내성 등지에선 석탄이 나서 그것을 이리로 실어다가 연료로 쓴다."

"아버님, 이곳 야장방을 한번 구경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려무나. 그런데 나는 네게 물어볼 게 있다."

"뭘 물어보시렵니까?"

"나는 병부에서 양신을 이리로 보낸 것을 놓고 어떤 의문이 든다."

해론은 부친이 뜻밖의 말을 꺼내자 표정이 굳어들었다.

"너는 양신을 보호하고 감시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그런데 이번엔 네가 이곳으로 데려오는 임무도 맡았다. 그 점에 대해서 어떤 의문점 같은 게 없느냐? 혹시 집히는 게 있다면 말해 봐라."

"아버님, 실은 그 일로 신경이 많이 쓰입니다. 양신과 이리로 오면서 이상하고 의문도 생겼지만 저로선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겠구나?"

"소자가 아버님께 이런 말씀을 드려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해 보거라."

"소자는 이 기회에 양신이 신라를 떠나게 해 주고 싶습니다."

찬덕은 좀 놀라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해론아, 너는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느냐?"

"양신은 신라에 와서 부당한 인질로 억울한 나날을 보내왔습니다. 그런 고통은 본인만 아니고 소자에게도 똑 같이 느낄 일입니다."

"나도 그 생각을 하면 항상 마음이 여간 무겁지가 않았다."

"소자는 나중에 어떤 책임을 지게 되는 한이 있어도 양신이 신라를 떠나게 해주고 싶습니다. 여기서 고구려와 국경은 멀지만 백제는 가까운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백제로 넘어갈 방도를 마련해 주하고 싶습니다."

해론은 솔직한 심경을 털어놓고 부친의 표정을 살폈다. 찬덕은 고뇌에 찬 표정으로 무슨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들의 일은 곧 자신의 일이라 또 다른 무거운 짐을 지게 된 기분이었다.

이틀 뒤 신주정으로부터 아란도가 가잠성에 왔다. 찬덕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맞으며 물었다.

"아란도, 여긴 무슨 일로 왔는가?"

아란도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성주님, 병부의 통문을 받으셨겠지요?"

찬덕은 아란도의 교활한 인품을 매우 싫어해 퉁명스럽게 물었다.

"자네는 군량미를 인수하는 일 같은 것을 다 맡는단 말인가?"

"소장은 그 일보다 또 다른 중요 임무도 띠고 왔습니다."

"또 다른 중요한 임무란 무엇인가?"

"서라벌에서 압송해 온 고구려인이 도착한 걸로 알고 왔습니다."

찬덕은 아란도의 대답을 듣고 내심 크게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신 말인가?"

아란도는 찬덕의 반문에 음성을 좀 낮추었다.

"소장은 그 자를 신주정으로 압송해 가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신주정으로 압송해 가다니? 무슨 이유로 그런단 말인가?"

"우리 군주님과 병부령께서 합의를 본 결정입니다. 때문에 해론 낭두는 그 자를 이곳으로 압송해 오는 임무를 수행하게 된 것입니다."

"병부령과 변품 장군이 무슨 합의를 봤는지 말해보게."

찬덕의 질문을 받고 아란도는 얼버무리듯 대꾸했다.

"소장은 그에 대해선 자세히 아는 게 없습니다. 그보다 병부에서 성주님께 지시한 새 무기의 시제품이 언제쯤 나올 지부터 알고 싶습니다."

"새 무기 시제품은 아무리 빨라도 보름은 더 걸릴 것 같네."

"소장은 시제품이 빨리 나올 수 있다면 시제품과 함께 양신을 압송해 갈 생각입니다. 그러니 시제품 제작을 서둘러 주실 순 없겠습니까?"

아란도의 말에 찬덕은 나름대로 생각한 바가 있어 고개만 끄덕였다.

"서두른다면 한 열흘쯤 기다려주면 될 것 같네만."

"성주님, 열흘 안으로 되면 더 좋겠는데 그렇게는 안 되겠습니까?"

"일을 해 봐야 알 일이므로 장담할 수는 없겠네. 최대한 빨리 만들도록 해 볼 생각이니 그 때까지 기다려 줘야 하겠네."

"성주님, 그러면 소장은 여기서 며칠 푹 쉬다 떠나겠습니다."

찬덕은 궁금한 점이 또 있었다.

"이번에 차송할 양곡은 어디에 쓰게 되는가?"

"그 점은 성주님께 미리 귀띔을 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말해 보게."

"신주정 군단은 곧 고구려 공격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고구려를 공격하다니? 무슨 이유로 전쟁을 벌인단 말인가?"

찬덕은 아연 놀라는데 아란도는 또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지난해부터 고구려가 마흘과 칠중성을 보강한 것은 성주님도 잘 알시는 일입니다. 그로인해 군주님께선 한수유역 방어가 힘들어질 걸로 판단하시고 모종의 함정을 파는 군사작전을 펼칠 계획이십니다."

"고구려와 충돌은 되도록 피하려는 게 조정의 방침이 아닌가?"

"고구려는 수국의 침공에 대비를 해야 해서 남방 방비가 허술해진 형편입니다. 군주님은 이런 기회를 놓칠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십니다."

"고구려에 닥칠 어려운 사정을 이용하려는 건 바람직하지가 않네."

찬덕의 대꾸에 아란도는 뜻밖의 말을 했다.

"성주님, 고구려는 수국에 곧 망하게 될 판입니다. 그런 고구려는 신라가 중립을 지킬 것을 간절히 바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라에 사정을 해야 할 판이고 신라는 그 대가로 임진수를 새 국경으로 삼을 것을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받아들이질 않으니 신라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이왕에 없어질 고구려 땅 중 신라가 조금 쯤 거둬들이자는 것이므로 군주님은 그 작전에서 큰 공을 세우려고 하십니다."

찬덕은 변품이 국가를 위해서보다 사감 때문에 고구려에 대한 원한을 풀려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보복을 하려고 나라에 큰 위험을 부를 지도 모를 시도를 하는 것에 우려를 금치 못했다.

"아란도, 나는 솔직히 말해 변품 장군이 개인적인 원한을 풀려고 그러는 걸로 본다. 나라를 위태하게 만들 수도 있으므로 중단해야 한다."

아란도는 찬덕이 변품과 사이가 좋지 않은 걸 알기에 대답했다.

"소장도 성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한수유역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낀 좁은 지형입니다. 방어에 취약점이 매우 큼은 성주님도 잘 아시는 일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자면 한수 유역의 영토를 넓힐 필요가 있음엔 누구나 동의할 일입니다. 병부령도 크게 호응을 하셔 모처럼 두 분이 의기투합으로 펼치려는 작전입니다."

"이번 양곡 공급은 그 작전을 위해서 쓰려는 것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앞으로 점령하게 될 고구려 지역의 안정화를 위해 그 쪽 백성들에게 양곡을 풀어 환심을 살 필요가 있다는 판단입니다."

"수국은 아직 출병도 않았는데 아국이 먼저 움직인다? 그렇게 해서 어떤 사태를 빚게 될지 면밀한 계산도 없이 움직이는 건 매우 위험하다."

"성주님, 이번 작전은 고구려 영토를 뺏는 데만 그치지 않습니다. 거기엔 또 다른 목적이 있음을 모르셔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또 다른 목적이란 게 대체 뭐란 말인가?"

"수국은 고구려 침공 시 신라의 호응을 요구합니다. 그걸 확실하게 만들 필요가 있어 신라에 적극 권하고 있습니다. 또 신라 역시 수국의 침공이 확실하게 되길 바라서 그런 작전을 펼 필요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돼야만 한다는 말인가?"

찬덕은 기가 막혀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데 아란도가 입을 열었다.

"성주님, 놀라지 마십쇼. 이 작전은 우리 군주님의 계획만은 아닙니다. 병부도 아닌 더 높은 데서 내려온 지시임을 아셔야 합니다."

"아주 높은 데서 내려온 지시라니 그게 어디란 말인가?"

"수국입니다. 수국 황제가 원해 적극 제안해 온 작전입니다."

"수국에서?!"

"그렇습니다. 성공 가능성이 커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게 됩니다."

"곧 추수가 시작될 시기에 전역을 일으켜 무슨 일석이조를 거둬?"

"추수기를 택해 작전을 펼칠 이유도 있습니다. 신라가 고구려의 곡창지대를 빼앗으면 추수를 앞둔 양곡을 손에 넣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전쟁 준비로 많은 양곡을 비축해야 만하는 고구려는 여간 큰 타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찬덕은 더욱 못마땅한 듯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아란도는 그러는 찬덕을 내심 비웃었다. 변품과 찬덕은 군문의 동기로 출발했다. 그러나 변품은 신주정의 군주가 되고 찬덕은 일개 성주에 머물렀다. 열등감에서 매사를 시기와 비협조로 나가는 걸로 봤다.

찬덕은 어두운 표정이 되어 그만 아란도를 상대하고 싶었다.

"아란도, 그만 객사로 가서 쉬게나."

"그렇지 않아도 소장은 물러가서 쉴 참이었습니다."

아란도는 고지식하고 고집불통인 찬덕과 더 이상 말을 나누기가 싫었다. 군례를 붙이고 냉큼 돌아서는데 찬덕이 다시 불러 세웠다.

"아란도, 한 가지 더 물어 볼 게 있다."

"뭡니까? 성주님."

"양신을 신주정으로 데려가면 어찌할 것인가?"

아란도는 그 말에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성주님이 왜 그걸 묻지 않으시나 했습니다. 성주님만 알고 계십시오. 군주님은 양신에게 분풀이를 하실 모양입니다."

"분풀이를 하다니? 무슨 이유로?"

"성주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백도 부장이 당한 일 때문입니다."

찬덕은 아연 실색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변품 장군이 그 일로 상심이 클 것이나 그렇게 해선 안 된다."

"성주님, 그렇게 해선 안 된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군주님은 울분에 찬 나날을 보내셨습니다. 또 남동생을 잃으신 부인께선 슬픔으로 매일 북녘 하늘을 보며 눈물만 흘리십니다. 때문에 이를 갈고 계시던 군주님은 고구려 왕제의 처남이 서라벌에 침투했다는 소식을 접하셨습니다. 그때부터 분풀이를 할 상대로 이보다 더 좋을 게 없다는 생각에 병부령께 압송을 청해서 허락을 받게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찬덕은 내심 크게 놀라며 더욱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신은 고구려 왕실과 관련이 없는 사람인 게 밝혀졌지 않은가?"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그가 고구려인임은 틀림이 없지 않습니까?"

아란도의 대꾸에 찬덕은 음성마저 굳어들었다.

"변품 장군께선 분풀이를 어떻게 할 셈인가?"

"목을 베어 고구려 국도로 보낼 생각이십니다."

"뭐라고?! 목을 베겠다고?"

"그 자는 신라 내정을 정탐하러 온 첩자입니다. 백도 부장도 고구려에서 같은 임무를 수행하다 처형을 당했으니 공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란도의 대답에 찬덕은 주먹을 불끈 쥐게 되었다.

"서라벌 조정도 양신이 첩자로 온 게 아님을 다 알게 되지 않았는가? 죄 없는 사람을 처형하겠다는 것은 말도 안 될 소리다."

"성주님, 피장파장으로 생각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군주님은 그렇게라도 보복을 하지 않으면 울화병을 도저히 다스릴 수가 없으십니다. 또 부인께선 남동생을 잃으신 상심과 고통이 오죽하시겠습니까?"

찬덕은 그만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죄가 없는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는 것은 안 된다."

아란도는 양신에 관한 얘기를 변품에게 전한 당사자였다. 찬덕의 말에 일리가 있고 변품 장군이 억지를 부리는 면이 없지도 않으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양신을 압송해 갈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 마음이었다.

"양신이 불쌍해 보는 면이 있다고 해도 나라를 위하는 게 우선입니다. 군주님은 신주정군이 출정하는 날 양신의 목을 깃대에 꽂아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게 만들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그만 해라. 아란도."

"성주님도 양신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게 되셔 거북한 입장임을 압니다. 그러나 제가 그 자를 끌고 가면 한시름을 놓게 되실 겁니다."

"내가 거북한 입장이라니? 그건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린가?"

"해론 낭두는 양신과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로 압니다."

찬덕은 격한 감정을 억지로 누르고 설득을 하려고 들었다.

"아란도, 자넨 변품 장군의 오른 팔 격인 참모일세. 또 사리가 있는 사람이 아닌가? 변품 장군이 사감에 의한 분풀이를 하려는 것은 막아야 하네. 장군께선 누구보다 자네 말을 잘 들으시는 걸 알고 있네. 자네는 양신을 신주정으로 압송하는 일을 막아야 하네. 만약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변품 장군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될 걸세."

아란도는 낯이 좀 붉어진 채 고개를 저었다.

"성주님, 제게 자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아란도, 최소한 양신의 처형만은 면하게 해야 하네. 자네가 말씀을 잘 드리면 변품 장군은 들어주실 것이므로 꼭 좀 부탁을 하겠네."

찬덕이 간절한 표정으로 고개까지 숙이자 아란도 역시 생각해 볼 점이 없지도 않았다. 검술 실력이 뛰어난 양신을 압송하는데 부담감을 느껴서 찬덕의 협조를 얻을 생각에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성주님이 자꾸 이러시면 소장의 입장은 매우 곤란하지만 성주님의 입장을 생각해 처형의 무리함을 군주님께 말씀은 드려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도 신주정으로 압송을 한 뒤에나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건 그렇지."

찬덕은 그런 대답을 들었지만 답답한 가슴은 가눌 길이 없는데 아란도가 은근한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성주님은 압송하는 날까지 잘 감시를 하시다 인계해 주십시오."

"아란도, 해론은 이 일에서 어디까지 책임을 지게 되는가?"

"해론 낭두는 신주정까지 압송을 완료해야 임무가 끝납니다."

"그런가?"

찬덕도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부드럽게 말했다.

"아란도, 알겠으니 그만 나가게 보게."

아란도는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는 찬덕을 보면서 밖으로 나갔다.

이튿날 아침에 해론은 상기된 표정으로 부친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아버님, 신주정 군단에서 아란도 부장이 오신 걸로 압니다."

찬덕은 무겁게 입을 떼었다.

"그 일로 네게 할 말이 있어서 불렀다."

"무슨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찬덕은 아들의 불안한 표정을 보면서 무겁게 입을 떼었다.

"나는 아란도로부터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이상한 소리를 들으시다니? 어떤 말씀입니까?"

"너는 양신을 호송하는 임무를 띠고 여기에 왔을 뿐만 아니라 신주정으로 압송해 가는 임무도 수행을 해야 하는 걸 알고 있었느냐?"

해론은 안색이 크게 변했다.

"아버님, 무슨 이유로 소자가 양신을 신주정까지 압송을 합니까?"

찬덕은 그에 대한 대답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해론은 묵묵부답인 부친에게 강한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아버님, 소자는 병부로부터 기만을 당한 것 같습니다."

"해론아, 기만을 당하다니 어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가?"

"소자는 아무 것도 눈치를 못 채고 여기에 왔습니다. 그러나 서라벌을 떠날 때 전군님과 유신이 석연치 않은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때부터 이 일에 무슨 음모가 깔려 있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무슨 음모가 깔렸다니 그건 무슨 뜻이냐?"

"양신의 장도는 그동안 병부에서 압수해 보관했는데 이곳에 온다고 해서 돌려준다는 것은 무엇보다 이해가 되지 않을 일입니다."

"나로서도 그 말엔 의문이 든다. 인질 신분인 양신에게 무기를 돌려준다는 것은 어딘지 석연치가 않을 일이요 예외적이란 생각도 든다만."

찬덕은 더 이상 말을 잇기가 곤란해서 말끝을 흐리게 되었다.

"거기다 전군님이 하신 말씀도 소자는 의미심장하게 들렸습니다."

"전군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기에 그러는가?"

"전군님은 양신에게 장도를 가지고 자신을 보호하는데 힘쓰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 태도가 영원한 작별을 고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말씀을 하신 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지 않은가?"

"아버님, 아무튼 간에 이번에 병부에서 소자에게 부여한 임무는 매우 예외적이므로 무슨 불순한 음모가 깔려있지 않을까 의심이 듭니다."

"불순한 음모라?"

"소자는 더 이상은 병부의 지시 따르지 않으렵니다."

찬덕은 아들의 대답을 이해하면서도 꾸짖는 말이 나왔다.

"무슨 소리냐? 감히 병부의 명을 따르지 않겠다니?"

"병부에서 무슨 불의를 저지르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소린 그만 해라.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

"아버님, 소자는 불의가 확실하면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양신이 신주정으로 압송을 당하면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모릅니다."

찬덕은 아들의 단호한 대답에 입을 다물게 되었다.

"소자는 양신이 신주정으로 압송되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게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소자는 어찌 해야 좋겠습니까?"

"나도 그 점을 걱정하고 있다."

찬덕이 비로소 수긍하는 태도를 보이자 해론은 더욱 반발했다.

"아버님, 양신이 매우 위험한 지경에 처한 게 분명합니다. 소자는 그런 일을 결코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해론아, 양신이 큰 위험에 처한 것은 분명하다."

"아버님, 양신이 어떤 위험에 처했다는 말씀입니까?"

"신주정으로 끌려가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양신이 무엇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된단 말씀입니까?"

"백도 부장이 고구려에서 처형을 당하지 않았느냐? 변품 장군은 양신을 처형해 고구려에 앙갚음을 하려는 것 같다."

해론은 너무도 놀라서 이젠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해론아, 나도 이 일을 어찌 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나."

"아버님, 오늘 밤에 양신이 성을 나갈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찬덕은 아들의 간절한 눈빛에 괴로운 듯 눈을 감고 말았다.

"아버님, 급히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해론아, 나는 좀 더 생각을 해보고 결정을 내리겠다. 그만 나가라."

"예, 아버님."

"그 대신 너는 독단적으로 어떤 일도 해선 안 된다."

해론이 무겁게 고개만 끄덕이자 찬덕도 굳은 음성으로 말했다.

"애비를 믿어라. 양신이 위험에 빠지게 내버려 두진 않겠다."

찬덕은 아들이 묵묵히 밖으로 나가자 수심만 더욱 깊어졌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쇠나라 11. 밀모